목록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15)
Timeful Friends
송강호의 탁월한 연기 때문이었을까. 그 이야기의 원래 인물이 가진 뜨거움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시대의 광기 혹은 열기 때문이었을까. 여운이 진하고 깊게 남아, 처음 극장 밖으로 나왔을 때, 나는 지금 이 곳이 크리스마스 이브의 2013년 서울이라는 감각을 가지기까지 꽤 시간이 걸렸다.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한 강렬한 얼떨떨함 때문에. 소시민적인 한 속물 인간이 자신이 속한 사회에 눈떠가는 과정이 실제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에서 나는 희망을 느낀 것일까. 불의하고 몰상식한 시대에 정의란 무엇인지, 국가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는 그런 것보다도. 아무래도 노무현이라는 인물이 담고 있는 그 열렬한 상징과 역사적 의미를, 송강호라는 배우가 해석하고 신들린듯이 담아낸 지점에서 발생한 감동인 것 같다. 내가..
[토요판] 정희진의 어떤 메모 , 조혜정 지음, 또하나의문화, 1994 ‘지식인’과 ‘랭킹’은 평소 내가 사용하지 않는 말이므로, 이 글은 잠시 일탈이다. 지식인은 해체된 지 오래된 단어다. 임시 복원한다면, 자기 노동과 일상을 언어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통념적 의미로 그냥 쓴다면, 우리 사회에는 세 유형의 지식인이 있다. 지식이 없는 사람, 지식인이라고 주장하고 간주되는 사람, 서구 지식과 ‘지금, 여기’의 경합을 쓰는 사람이다. 조혜정 ‘선생님’은 세번째에 속하는 극소수 중 한 사람이자, 그중에서도 선구자다. 종종 출판단체나 신문사에서 ‘명저 50선’, ‘주목받는 저술가’ 같은 명단을 만드는데, 재고되어야 한다. 사회 각 분야는 다양하다. 보이지 않는 분야가 너무 많다. 레즈비언이..
우리는 지금 말의 범람과 결핍을 동시에 경험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수다스런 말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동시에 말의 지독한 공백을 절감해야 하는 그런 부조리한 시대를 말이다.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았던 때가 언제 있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다. 한 사람의 독재자만이 말을 할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 그의 말은 곧 명령이었다. 그 시절 말을 빼앗겼던 사람들조차 돌아보건대 그 시대가 명령의 과잉을 요구하던 시대였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명령의 과잉을 용서할 수 없었던 시인은 깊은 밤 부엉이의 노래를 불렀다. 침묵 대신. 비록 지지(遲遲)한 노래이고, 더러운 노래이고, 생기 없는 노래일망정. 말의 자유를 빼앗겼으므로 대다수 인민은 침묵했다. 그러나 침묵이 곧 결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나 기억이라는 것은 흠씬 얻어맞은 개 같은 것"이기 때문에 "이야기는 쓰는 것이 아니라 붙잡는 것"이라는 가르침에 홀딱 반했다. 글쓰기 관련 책은, 거의 처음으로 끝까지 다 읽었는데, 그것은 이 책이 애초에 스킬 같은 것을 가르쳐주는 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붙잡는 것이라는 식으로, '내가 알아들을 만하고 좋아하는 방식'으로 글쓰기의 본질을 알려준 책을 처음 만났다. 나의 글을 써야 할 때가 점점 다가온다. 두고두고 옆에 끼고 글쓰기가 겁날 때마다 유쾌한 에너지를 공급받아야겠다. 이 책의 부제는, 글 못 쓰는 겁쟁이들을 위한 즐거운 창작 교실,이니 만큼. 참, 책 뒷부분에 짧게 붙은 정혜윤의 추천사는 정말 매력적이다. 그 또한 글쓰기의 본질을 일깨워주는 좋은 문장들이니, ..
[한겨레 토요판] 리뷰&프리뷰 정희진의 어떤 메모 장승수 지음, 김영사, 2007 이 책은 제목이 화두다. 의도가 분명한 책의 운명, 책 내용은 읽기 전후가 ‘같았다’. 20살 청년이 막노동을 하면서 5수 끝에 서울대에 수석 합격. 지은이‘만’ 가능한 개인적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내가 알기로 이 책은 174쇄를 찍었고 150만권 넘게 팔렸다. 이 사례를 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제 더 이상 ‘개룡남’(개천에서 난 용)은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나는 “공부가 가장 쉽다”는 말에 관심이 있다. 다양한 분석을 필요로 하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공부는 ‘쉽다, 어렵다’ 차원에서 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공부가 쉽다니” 불평하는 네티즌의 ‘망언’론, “너도 할 수 있어” 등은 이 글귀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