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15)
Timeful Friends
『낯선 시간 속으로』|이인성|1983|문학과지성사 1 소설은 시간의 조형물이다. 대담하게도 이렇게 정의하려면, 시간은 감각적 대상으로 점, 선, 면, 양감, 가소성 등을 지니며 일정한 공간을 점유한다고 전제해야 한다. 최소한 그렇게 상상해야 한다. 섬세한 철학 논증은 나중을 기약하며, 차라리 시간은 소설이라는 조형적 메타포를 통해, 필수 불가결한 허구 장치를 통해, 시·촉각적 구체성을 얻는다고 바꿔 말하자. 시간은 소설의 뼈대와 살을 투과하면서 인간의 감각에 영향을 행사하는 파상 에너지를 증폭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시간을 인식하고, 포합하고, 구부리고, 뭉치고, 절분하고, 배치하고, 놓아 보내며, 이 모든 과제의 완결을 미루며, 그것에 신체를 부여하는 기술이다. 시간의 운동성과 생성파괴력과 대결하며 마침..
내가 이 아름답고도 선한 책을 만난 것, 우연히 그 신비로운 북토크 밤에 초대된 것, 모두 마술이다. 표지부터 내용, 저자까지 모두 아름다운 이 책은, 그러나 무척 윤리적인 내용이다. 정혜윤은 '무지한 스승'들에게서 삶의 방식을 듣고,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을 '살게 하는 마술'은 무엇이냐고. 그 날, 단 40명만이 모여 한 방에 겹겹이 둥글게 앉아 이야기 나눌 때, 우리는 저자의 이야기를 들을 뿐 아니라 나의 마술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물론 수줍은 나는 말하지 못했지만 만약을 대비해 두어 가지의 이야기를 생각했고, 북토크가 끝나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버스 정류장에 앉아 함께 간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건넸다. 아름답고 환상적인 여름밤이었다. 내가 던진 질문에 따라 살게 된다는 통찰은 오늘도 내가 한..
6월16일, 지역 생활협동조합 모임에 참석했다. 사회자가 “오늘이 세월호 사건 두 달째”라며 묵념을 제안했다. 묵념 후엔 노래 ‘천개의 바람이 되어’를 불렀다. 70명의 참석자들은 “선거, 월드컵… 일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지만 그럴수록 더욱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요즘 흔히 듣는 얘기다. 12년 전의 기시감. 2002년 한·일월드컵과 미군 장갑차, 브라질월드컵과 세월호가 함께 떠오르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폴란드전 승리 후 온 나라가 흥분해 있을 때 경기 양주시에서 미 2사단의 부교 운반용 장갑차가 갓길을 걸어가던 중학교 2학년 신효순, 심미선 학생의 몸을 깔고 지나갔다. 세월호만큼이나 이 참사도 예고된 것이었다. 장갑차가 도로 폭보다 컸기 때문이다. 도로보다 큰 장갑차에서 보행자가 보일 리 없..
지금이라고 말해줄게, 강물이 흐르고 있다고, 깊지는 않다고, 작은 배에 작은 노가 있다고, 강을 건널 준비가 다 됐다고 말해줄게, 등을 구부려 머리를 감고, 등을 세우고 머리를 빗고, 햇볕에 물기를 말리며 바위에 앉아 있다고 말해줄게, 오리온 자리가 머리 위에 빛나던 밤과 소박한 구름이 해를 가리던 낮에, 지구 건너편 어떤 나라에서 네가 존경하던 큰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도 들었다고 말해줄게, 돌멩이는 동그랗고 풀들은 얌전하다고 말해줄게, 나는 밥을 끊고 담배를 끊고 시간을 끊어버렸다고 말해줄게, 일몰이 몰려오고, 알 수 없는 옛날 노래가 흘러오고, 발가벗은 아이들이 발가벗고, 헤엄치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강가, 뿌리를 강물에 담근 교살무화과나무가 뿌리를 강물에 담그고, 퍼덕이는 커다란 물고기가 할아버..
버스에 가장 오래 앉은 사람은 가장 바깥에 산다 그곳은 춥다 버스에 외투를 벗어두고 종점에서 내린 적이 있다 다른 나라 더운 도시의 공항이었다 맨발로 비행기에 올라 더 멀리 나는 갔었다 옆자리에는 같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의 이어폰에 찌걱찌걱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같은 이별을 경험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때 그 버스에 가장 오래 앉은 한 사람은 내가 벗어둔 외투를 챙겨 입고 혹독한 겨울로 무사히 들어갔을까 버스 종점에서만큼은 커피 자판기가 달빛보다 더 환하면 좋겠다 동전을 넣고 손을 넣었을 때 산 짐승의 배 속에서 꺼낸 심장처럼 뜨끈한 것이 손에 잡히면 좋겠다 어떤 나라에서는 발이 시리지 않다 어떤 나라에서는 목적 없이 버스를 탄다 그러나 어떤 나라에서는 한없이 걸어야 한다 피로는 크나큰 ..
장미꽃이 투신했습니다 담벼락 아래 쪼그려 앉아 유리처럼 깨진 꽃잎 조각을 줍습니다 모든 피부에는 무늬처럼 유서가 씌어 있다던 태어나면서부터 그렇다던 어느 농부의 말을 떠올립니다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경멸합니다 나는 장미의 편입니다 장마전선 반대를 외치던 빗방울의 이중국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이 모두 다 아는 일이 될 때까지 빗방울은 줄기차게 창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창문의 바깥쪽이 그들의 처지였음을 누가 모를 수 있습니까 빗방울의 절규를 밤새 듣고서 가시만 남아버린 장미나무 빗방울의 인해전술을 지지한 흔적입니다 나는 절규의 편입니다 유서 없는 피부를 경멸합니다 쪼그려 앉아 죽어가는 피부를 만집니다 손톱 밑에 가시처럼 박히는 이 통증을 선물로 알고 가져갑니다 선물이 배후입니다
잡지를 만든다고 모이는 모임의 책임자가 시시각각 보내오는 참여독려문자를 불편한 심정으로 마음 한 켠에 개켜두었는데, 오늘 막상 직접 그 책임자의 책임자와 통화를 하고나니 마음이 한결 더 불편해졌다. 오랜기간 여러 잡지를 정기구독하고, 잡지를 좋아하고, 그 형식의 잡스러움을 사랑하는 바이지만, 잡지를 만드는 일에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웃기는 일이다. 열혈독자지만, 내가 잡지를 만들 마음은 없다는 것. 부질없이 실패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아니, 이미 구술문화가 다시 도래한 듯한 이 세대에, 이미지 인문학을 말하는 시대에, 텍스트 중심이 될 것이 뻔할, 그리고 딱히 고퀄이거나 대중의 관심을 끌지도 못할 주제일 것이 예상되는, 무엇보다 매체 환경에 그다지 감각적이지 못한 누군가들이 이 일을 한다는 것이..
비가 오는 날이어서인지, 월경의 마지막 날이어서인지, 호르몬 상태의 불균형을 느끼며, 머리를 올리고 책상 의자에 앉았다. 입식 책상과 의자를 좌식으로 바꿀 계획을 갖고 있다. 나의 계획은 긴 로딩 시간을 갖고 있기에, 언제 그 일을 실행할런지는 모르겠지만. 입식이 좌식으로 바뀐다고 하여, 내 여름, 슬럼프가 무사히 지나가겠냐마는 그래도 일말의 계획을 품어본다. 여름에는 정신이 빠르게 돌아가지를 않는다. 밥맛 떨어지듯, 글에 대한 욕구가 여러모로 부실해지는 때를 나는 슬럼프라고 부른다. 특별히 나를 끌어당기는 작가나 책도 잘 생기지 않고, 나 또한 어느 정도의 논리성을 지닌 글을 쓰는 일에 애를 먹는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은 어떤 계기가 없어도 꿈이 부풀어오르고 활자가 생기있게 다가오는 계절이다..
정희진의 어떤 메모 , 서형원·하승수 지음 이매진, 2014 지구상 인구가 70억명이라면 70억개의 당파성이 있지만, 대개 사람들은 객관성으로 간주되는 강자의 당파성과 동일시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개인 특히 사회적 약자가 당파성을 드러내는 일은 뒷감당의 용기가 필요하다. 민망함, 책임감, 공부…. 실천으로 자기 생각을 증거해야 하기에 삶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건 내가 이민 가고 싶은 이유 중 하나인데, 우리 문화는 입장이 분명한 사람을 싫어한다. 자기 입장이 분명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여성, 동성애자, 장애인(운동가)- “나는 당신들과 다른 부분이 있고 이 차이는 당신들이 만든 정치적 문제다”라고 주장한다. 당파적일 것 같지만 의외로 일부 좌파 집단은 예외다. 한국의 좌파는 정치경..
마크 롤랜즈는 위스키를 한 병 다 비우며 글을 쓰고, 셜록은 니코틴 패치라도 붙이며 생각을 해나가는데, 나는 꼴랑 커피 몇 잔에나 의지하여 생각을 감당하고 있으니 늘 허덕인다.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성령이라도 충만해야 하는데, 이게 위스키에도 성령에도 취하지 못하고 있으니, 늘 미지근하다. 제정신으로는 이 긴장의 작업들을 감당하기 어렵고, 미지근한 정신으로는 미지근한 결과물만 나올 뿐이다. 한편, 내가 내 책상에 늘 놓아두는 책은 최종규의 다. 어떤 말을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을 올곧게 밝히고 있는 글이다. 지식을 다루는 마음가짐, 지식을 북돋우는 슬기는 올바른 말로부터 나온다고 믿는 저자의 생각은 나의 지성을 맑게 정리해준다. 취하거나, 맑거나 무엇이든 하나는 되어야 할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