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파이 이야기 (31)
Timeful Friends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작풍을 충실히 따를 정도로 좋아한다는 챈들러의 명성은 이미 김중혁이나 정유정 작가를 통해서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챈들러의 무엇이 작가들로부터 무한 찬사를 받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했다. 설령 포크너라 할지라도 챈들러처럼 글을 쓸 수는 없다지. 그런데 내가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어서인지, 아직 한 권 밖에 안 읽어서인지 하드보일드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는 못한 것 같다; 아니면 이미 그의 문체의 영향이나 '필립 말로'라는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의 전형이 이미 우리 시대에는 새로울 것이 없어져 그 오리지널리티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 수 있겠다.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묘사와 문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임무를 완수하는 말로의 쿨함은 어쩌면 우리 시대에서는 너무 흔해져 버렸으니; 깊..
강풀 작품을 만화로 본 건 처음이다. 영화로는 더러 봤고, 웹툰을 웹으로 굳이 찾아보지는 않으니까. 이 작품을 보면서 그에 대해 다시 느낀 것은, 정말 따뜻한 인간일 것 같다, 인간의 선의를 이토록 굳게 믿는 사람이 또 있을까, 교회 열심히 안 다닌 게 분명하다(ㅋㅋ;) 이렇게 인간에 대해 그윽히 바라보고 깊이 이해하는 게 연습된 걸 보니. (오만하고 냉정한 정죄를 일삼는 종교인 부류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시선!) 등등이다. 텍스트에 함몰돼 갈 길을 잃은 내 영혼에 단비를 뿌려주고자 빌려온 만화들 중 단연 의 흡입력은 최고다. 스릴러를 가장한 순정만화에서 사랑의 의미, 구원의 의미 같은 철학적 가치에서부터 '마녀'라는 낙인이 가지는 사회적 문제까지 두루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작가가 가진 내공의 그릇을 ..
천명관이라는 이름에, 책 제목에, 이끌리듯 집어들었고, 역시 천명관!이라는 생각 속에, 책 제목만큼이나 슬픈 재미를 느낀다. TV에서도 소외된 인간들의 이야기랬나. 그래서인지 불편하고 본능적 에너지가 넘치며 내 주위에 없었으면 하는 군상들의 실패담들로 가득찬 이 단편집은, 오로지 천명관만이 구축해낼 수 있는 허구의 세계들이다. 다시 한 번 그의 생의 이력을 찾아보게 만드는 여덟 편의 단편들. 그 이야기가 그려낸 실패들은 우리들의 엄연한 현실이기에 조금은 우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덧붙이자면, 그의 소설이 다루는 군상과 주제를 마주하며, 나는, 가장 소설다운 것이 무엇인지, 왜 소설이어야 하는지를 너무도 충실히 배울 수 있었다. * 2014, 창비.
유키에, 고마워. 사랑받는 것에 목마르던 한 사람이 어떻게 사랑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보여줘서. 그 배경이 된 (조금 밉지만) 이사오와 구마모토, 아, 구마모토! 너희 둘도 고마워. 인생의 엄숙한 의미를 담은 4컷 만화, 여러 날의 묵상을 마치고. JIGYAKU NO UTA by Yoshiie Gouda Originally published in Japan in 2007 by TAKE SHOBO PUBLISHING CO., LTD. * 2009, 세미콜론. (송치민 옮김)
감각적인 제목이 주었던 기대만큼 재미있게 읽지는 못했지만,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고난 듯한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뭔가 영화화하기에 좋은 밑밥들이 깔려있는 소설같다. 난 구동치 역할에 하정우를 떠올렸고.ㅋ) 딜리터, 역할을 하는 탐정 이야기인데 그 소재의 참신성과 제목만큼 감각적인 주인공 이름 구동치, 뭐, 이 정도까지의 설렘 이상의 것을 얻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인간 실체를 관념적 서술이나 내면 천착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원동력인 돈-거대 기업의, 성-포르노 사업을 매개로 건드려보려고 한 것, 인간이 기억을 소유하려고 하는 욕망이 어쩌면 자신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버리고자 하는 욕심과 한통속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생각했고 내 삶을 좀 돌아보게는 되었다. 만약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
에서 압도당한 정유정의 서사를 되짚어 가고 있다. 과연 이 책이 작가의 두 번째 작품이 맞는 것인가. 나는 기꺼이 정유정빠가 되겠다. 지난 여름에 읽은 의 여운이 아직도 내 마음속에 꿈틀거리는데, 이 책 의 승민과 수명은 이제 의 재형, 링고, 스타, 윤주가 들어앉아 똬리를 틀고 있는 내 마음 한 구석에 비집고 들어와 같이 살림을 차릴 기세다. 지금 영화화 되고 있다는데, 정말 이보다 정확할 수 없는 캐스팅에 정유정빠로서 마음이 흡족. 무엇보다 어떤 캐릭터보다 독보적인 매력과 강렬함을 겸비한 류승민, 그 녀석이 배우 이민기의 얼굴로 새겨진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ㅋ 정유정의 소설이 그려내는 일종의 구원자 혹은 삶의 윤리적 모델이 서재형이었다면, 삶의 미학적 모델은 류승민이 아닐까. 승민은 도널드 밀러의 ..
역시 이동진의 빨책이 가진 위력이란. 요근래 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보이는 것을 보면.ㅎㅎ 김중혁의 강력한 낚시에 기꺼이 낚여 이 두껍고 어려운 책을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었다. 지루하고 어렵고 불편한 긴장을 감내하며 읽어나가다 중간 이후 잠깐씩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던 이 이야기의 예기치 못한 방향, 도덕적으로 천진하며 자기가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착각한 열 세 살 브리오니로 비롯한 세실리아와 로비의 (...... 어떤 단어로 지칭하기 어렵다.) 불행, 아니,'사랑'. 그래, '사랑'. 이루지 못한, 순간의 관능과 애틋함, 그리움이 대부분이었을 사랑. 그 배경을 이루는 전쟁이라는 시대의 격랑은 이 소설의 장중함을 더하는데, 한 개인의 가장 사적인 영역인 듯한 사랑조차 그것이 얼마나 시대와 긴밀하게 ..
내친김에 박민규의 첫 소설을 집었다. 원래는 을 빌리러 갔었는데 그 자리에 떡하니 이 있네? (하나도 아니고 두 번째 도서관에서도 은 분명 '열람비치'였으나 제자리에 없었다! 무슨 일임. 아...정말 보고 싶다. .) 삼미 바로 직전이자 박민규의 신인상 수상작이기도 한 은 삼미와 그 문제의식을 같이 한다.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풍자, 그것이다. "처음엔 강제가 아닌 줄 알았는데, 맙소사 황당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미국 현지에서 공부하고, 대학까지 나온 인재들도 요즘은 수두룩하다는 얘기다. 졸업장이니 뭐니 그런 것이 나의 약점이기도 하지만 이곳은 늘 그런 식이다. 말인즉슨, 싫으면 나가라는 얘기인 것이다. 그것이 한국의 시스템이다. 저질이다."(157쪽) 그것이 한국의 시스템이다. 저질이다. 이..
냉소와 순수의 원형, 홀든 콜필드를 왜 이제서야 만난 것일까. 물론 지금의 내가 열 여섯 홀든의 정처없는 방황의 마음을 온통 공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절벽의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도록 지켜주고 싶다는, 실패충만한 어리석은 꿈을 꾼다는 면에서 나는 여전히 그와 같은 방황을 하고 있다. 겨울이 되면 센트럴 파크 연못에 있는 오리들은 어떻게 되는걸까. 나도 불안한 마음으로 매일 그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버스를 타고 차창을 내다보던 삶의 어느 순간, 내가 아직도 답이 없는 질문 앞에 방황하고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면 나조차도 당혹스러운 그런. 십대의 전유물인 것만 같은 그런 상태의 주변을 왜 내 마음은 여전히 서성이고 있는 것일까. 나만 그런 것일까. 아니면 우리는 사실 모두 ..
6-7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것은, 몇몇 후배 간사들과의 책모임 때문이었다. 한 달에 한 번 문학을 정해서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지난 4월의 책은 바로 이 이었다. 물론, 내가 정한 책이다.^^ 2003년에 나온 이 책을 다시 읽어도 여전히 그 날선 주제 의식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대한민국이 그대로거나 더 나빠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자본주의의 민낯이 더 포악하게 우리 삶을 침투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국가라는 이름의 폭력, 미국이 프랜차이즈화시키고 있는 자본주의, '프로'라는 이름으로 일어나는 인간성 말살, '중산층'의 탄생 등. 아, 이런 재미없는 단어들을 박민규는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전설의 야구팀을 통해 미친 유머의 문체로 비판한다. '지는 것'을 통해 자본주의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