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명랑한 밤길 (12)
Timeful Friends
언젠가부터 내 마음속에 남은 작품 제목이다. '복원되지 못한 것들을 위하여'. 읽은 것도 아니고, 내용이 궁금한 것도 아닌데, 제목 자체로 내게 많은 정서를 불러일으켰다고나 할까. 박완서의 단어 선택, 언어 감각, 시선은 그 자체로 내게 와닿는 면이 있다는 것. 굳이 읽어야겠다고 소망한 것도 아닌데, 때가 되어서 내게 도착했다. 이 작품. 이번 도서전에서는 정확히 내가 사려고 한 책만 사야지, 책낭비하지 말아야지, 마음을 굳게 먹고 간 터라, 웬만해서는 내 마음을 끌지 못했었던 책과 책 가격들이었는데. 마지막에 나오는 길에 한 번 더 들른 문학동네에서 리퍼브 도서 코너에 이 책이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아무 관심 없는 요리와 여행, 자기 계발 서적(요리와 여행, 자기 계발에 관심없는 게 아니라 요..
지난 3월, 벚꽃 필 때쯤 읽고,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다'라는 마음에 잔잔히 압도되어 다시 읽어야지,하고 한동안 간직하였다가 다시 꺼내 읽었다.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2014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저자와의 대화 이벤트에 김연수를 신청해놓고. 오늘이 발표 날짜였지만, 통보가 오지 않는 걸로 보아 이벤트에 선정되지는 못한 것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느낌의 이야기를 지어내는, 수선화 같은 문장을 구사하는 김연수를 만나고 싶었는데. 흑. 김연수가 쓰는 단어, 비유, 사물과 장소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 담백한 문장. 모든 것을 닮고 싶다. 그리고 일상적이라 여겨지는 순간을 포착하여 삶의 의미를 끌어내는 시선은 무엇보다 우리의 일상을 아름답게 가꿔주기 때문에, 고맙다. '벚꽃 새해'는 "본인은 스물아홉 살이라고 우기..
온라인 헌책방에서 필요한 책을 구입할 때마다, 배송료를 덜어내고자 계획에 없는 책을 함께 고르곤 한다. 배송료에 지불할 돈을 책에 지불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배송료 이상의 헌 책들을 모으는 이런 짓을 반복한다. 그래도 스스로 위로한다.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책을 구입할 때도, 나도 모르게 쌓인 어떤 직관에 따라 제목보고 고른 책이 길을 열어줄 때가 종종 있다고. 원래 무슨무슨 문학상 작품집을 잘 사지 않는데, 책들을 둘러보다가, 권여선이라는 작가와 '사랑을 믿다'라는 제목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나는 무엇에 이끌린 듯, 확고한 신뢰로 화답하며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전부터 권여선의 글을 읽어보고 싶었던 마음과 언제나 반쯤 회의적인 마음에 빠져 있는 내게 필요한 두 단어, 사랑과 믿..
바보 그리고 몸. 이 화두는 군인인 첫째 형 시몬과 상인인 둘째 형 타라스에 대비된 농부 바보 이반을 통해 이상적으로 구현된다. 이반에게 있어, 군인들은 권력의 수단이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존재일 때에만 의미있고, 금화를 만드는 기술은 축일의 '놀이'일 때에만 재미있다. 이런 바보 이반이 있는한 권력과 돈 욕심에 눈이 먼 형들이 있어도, 세 형제는 싸우지 않는다. 늙은 악마는 이들을 분열시키고자 세 마리의 꼬마 도깨비를 보내지만, 결국 다 실패하고 스스로 나서서 이반이 다스리는 바보 왕국에서 '머리를 쓰는 방법'을 알려주다가 그 방식을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보들 앞에서 패하고 만다. 악함이 패배하는 곳은 오로지 바보들 앞에서다. 이반을 보며, 톨스토이가 그려내는 이상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그려본다..
의 제5회 손바닥 문학상 당선작. 의 오랜 독자여서 그런지 몰라도, 손바닥 문학상 당선작들은 하나같이 내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잡지가 늘 초점을 맞추고 지면에 담아내는 사람들과 그 주제, 세상사를 보는 관점과 고스란히 맥을 같이 하는 작품들이기도 하고, 손바닥만한 짧은 이야기의 주인공들이 나의 마음 속 형제자매인 사회의 소수자들이기 때문이어서 더욱 그럴 것이다. 2013년도 당선 작품들이 2014년 신년호에 작은 별책부록으로 묶여서 배달되었다. 뇌병변 장애를 가졌지만, 정신만은 또렷이 살아있으며, TV를 통해 사회를 배우고 분별력을 익히기도 한 19살 여자가 자신을 돌봐주는 사회복지사를 오히려 품어안는다는 설정은 약하고 무른 어떤 존재를 그것보다 더 약한 존재가 일으킨다는 점에서 전복적 희망을 선사한..
도선생!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소. 하지만, 당신 작품 속 인물들이 펄펄 살아움직이고 있다는 것만은 인정하리다. 가난한 자들의 심리를 정확하게 포착한 것도 소름끼치는 면이 있고. 쁘로하르친 씨가 그렇게도 궁색하게 살며, 병적으로 자기 현금에 집착하다 죽은 후에야 소장 현금이 밝혀진 점에 나름 반전의 묘미가 있었지만, 아직까지는 문학청년의 서투름이 더 돋보이는 듯한데. 대작가도 이런 시절이 있었음에 안위를 얻는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의미가 있는 것인지요? 2007, 열린책들. (이항재 옮김) .
여성성의 재정의. 예술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여성이 아니라, '지금, 여기' 존재하는 여성이라면 아마도 소네치카와 같을 것이다. 필립 로스의 에 나오는 아내가, 인내와 강인함을 소유한 러시아 여성이라면 이런 대응을 했을까 싶다. (어떤 소설을 읽어도 변주되어 떠오르는 . 정말 '에브리맨'을 위한 소설인가보다.) 무엇보다, 시대가 어떤 격동을 겪든, 어느 상황에서나,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는 사건의 보편성에 소름이 돋았고, 어떤 예술가의 아내가 떠올라 책을 덮고 한참을 울지도 냉소하지도 못한 채, 멍하니 있었다. 그 어떤 이가, 누군가의 개별적인 선택과 그 자신만 아는 삶의 내밀한 의미를 규정하고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2012, 비채. (박종소 옮김)
서사보다는 직관과 상상을 바탕으로 한 누군가의 주관적이고 깊은 이해는 그 자체로 훌륭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아름답고 짧은 이야기. 설명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그 존재 자체로 빛을 발하는구나. 여기서 제일 좋아하는 문장은 이것. She had not sacrificed her independence. * , 2006, 하늘연못. (유진 옮김) A Haunted House, and other short stories, by Virginia Woolf Moments of Being “SLATER’S PINS HAVE NO POINTS” “Slater’s pins have no points — don’t you always find that?” said Miss Craye, turning round as t..
외롭고 약할 뿐이어서 도움이 필요한 부류에게, 간사일 때의 습관을 따라 도움 비슷한 것을 베풀고는 후회하곤 한다. 부질없는 짓이었어. 결국에는 혼자서 알아내고 걸어가고 결정해야 할 뿐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잖아? 그런 방식의 '도움'에서 역시 돌아오는 것은 더 큰 징징일 뿐이네. 이런 후회. 그냥 '김박사'가 되어버릴걸 그랬나. 이런 후회.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어느 지점까지 관여할 수 있을까, 그런 윤리를 이 소설은 묻고 있다. 결국에는 스승이나 멘토 따위를 찾아 답을 달라고 징징대는 것이나, 내 자신이 스승이나 멘토인 것처럼 착각하고 답을 베푸는 행위 같은 것은 그만두고, 서로의 가장 연약한 지점에서 겪어낸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답인가보다. , 2013, 문학과 지성사.
최악의 조건에서 최선의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랬나? * “애 가진 여자가 밥 먹는 모습은 짠하다. 새끼 밴 어미가 먹는 것을 저 뱃속의 또 한 생명이 기다리고 있다. 애 가진 여자들한테는 뭐든지, 누구든지 먹을 것을 퍼주어야 한다. 그것이 생명에 대한 도리다. 그러나 내게는 누구도 밥을 주지 않았다.”(205쪽) 라는 작품에 나오는 이 구절은 모성의 권리 선언이라 할 만하다. 어미는 세상을 향해 먹을 것을 요구할 당당한 권리가 있다. 그것은 어미가 생명의 담지자이기 때문이다. 어미가 그런 권리를 주장하는 근거는 새끼를 먹여야 한다는 의무에서 온다. 어미의 권리는 새끼에 대한 의무를 전제로 한 권리인 것이다. 그러나 의 주인공 어미는 제 새끼를 부양하지 못했다. 십대 미혼모로서 낳은 아이를 얼굴도 보지 않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