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공부하는 삶 (10)
Timeful Friends
논문에서 언어의 역사적 맥락을 다루기 때문에 가장 먼저 찾아본 책은 물론 내 방 책장에 1940년대부터 좌르륵 꽂혀 있는 시리즈였다. 어떤 한 주제에 깊이 천착하지 않고 정말 산책하듯이 당시 사건과 인물을 거의 연도별로 빼놓지 않고 서술하는 방식은,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기의 정황과 분위기를 압축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준다. 무엇보다 내가 관심을 두고 있는 '언어의 사회적 맥락'에 대해 통찰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이 많아서 유익했다. 언론학자답게 당대의 언론 자유에 대해서는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웠던 것은, 내가 태어난 1980년 1월의 정황을 처음으로 자세히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태 내가 태어난 때의 대통령, 정치사회문화적 배경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영광스럽게도(?) 그 ..
내일 있을 북지부 죠이 독서캠프 준비차 읽었는데, 이메일을 점검해본 결과, 내일의 주제는 나의 독서 편력기에 가깝기에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않는 선택이었다.ㅋ 다만, 한 가지 건져올린 통찰은 "나에게 어려운 책은 내게 필요없는 책이다. 내게 필요한 책은 반드시 내게 쉽다"는 것. 독서의 속도, 혹은 모두가 읽어야할 필독서에 정답이 없는 것은 각자 처한 상황이 다르고 이해의 속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핵심은, 지금, 나,의 책을 고르는 데 있다. 작가 김연수가 책 읽을 때 제일 오래 걸리는 시간은, 읽지 않을 책을 가지치기 하는 시간이랬나. 시간이 갈수록 동의할 수 밖에 없는 말이다.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읽을 책을 고를 수 있는 안목 그리고 태도. * 2014, 사월의 책. (이규원 옮김)
한 작가가 무려 12년에 걸쳐 홀로 과 관련책들을 연구하여 만화화한 조선왕조실록. 완간기념판을 구입해서, 나도 저 사진의 고풍스런 빨간 용무늬 박스의 20권 세트를 받았다.ㅋ 원본에 충실한 내용에 작가 특유의 해석과 유머를 겸비했으니, 이 정도면 지식 만화로서 꽤 훌륭하지 싶다. 한 권 한 권 읽어나가며 팟캐스트와 함께 곱씹으니 나름 조선의 역사를 잘 공부하고 있는 셈이다. 선조 시대 이순신 이야기를 마무리로 전체 20권 중 10권의 반환점을 겨우 돌았는데, 만화여도 역사책이어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조선 중반까지 오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역시 세종, 이순신 그리고 이이. 세종과 이순신은 이미 충분히 유명하지만, 알면 알수록 더 탁월한 인간상들이기에 그들에 대해서는 추후 더 깊은 독서를 하고 싶은..
"양식(良識)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된 것이다. (Good sense is, of all things among men, the most equally distributed.)" 고전 그것도 철학서는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나에게 큰 흥미를 자극한 책. 일단 저 첫 문장을 읽고 바로 물음표를 붙였던 나는, 의 첫 문장이 중세 스콜라 철학을 지나 인간의 주체성을 선언하는 중요성을 지닌 것과 별개로, 경험에 의해 저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역시나 난 근대인은 아닌가보다, 했는데, 그 다음에 줄줄이 써 있는 문장은 그런 내 생각을 예상했다는 듯이 전개되었다. "왜냐하면 각자는 그 양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모든 다른 일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그들이 가지..
대학원 졸업시험을 준비할 때, 생태여성주의 관점으로 언어를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고든 카우프만을 만났다. 카우프만은, 하나님에 대한 전통적인 이미지는 군국주의나 도피주의를 지지하기 때문에 지구의 운명을 위해 요구되는 인간의 책임성에 대해서는 관심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했다. 내가 개혁주의 신앙에서 때때로 무력해지는 이유가 무엇인지 실마리를 잡을 수 있는 통찰이었다. 하나님의 진리가 인간에 반하여 대자적으로 독립성과 객관성을 갖는다는 도식은 결국 특정 시대의 사유와 관점으로 대상화된 하나님 개념을 우상화하는 지경으로 빠져드는 위험성을 안고 있다. 카우프만은 '있음의 질서'와 '앎의 순서'를 구별하여 1차 신학과 2차 신학 과정을 구분하고, 전통적 신학 작업이 "있음이 있음 그 자체대로 읊어질 수 있다"..
영장류적 특성을 두드러지게 표출하던 두어명의 인간이 떠오른다. "영장류의 사회적 지능의 핵심은 속임수와 계략"(92쪽)임을 그 특유의 의뭉스러움으로 각인시켜 주었던 그들. 물론 난 그들이 의도적으로(?!) 그랬을 것이라 믿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영장류적 본능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 영장류적 특성은, 정의 혹은 사역이라는 아니면 하나님 나라,라는 가치로라도 포장되고 실제로 그 그림의 언저리에서 그러한 결과물을 내기도 한다. 두루 칭찬받고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얻기도 한다. 마크 롤랜즈라는 이 지나치게 매력적인 철학자 아저씨는 이런 말을 한다. "근거,증거,정당화,보장. 정말 사악한 동물들에게만 필요한 개념이 아닌가? 불만이 많을수록 더 사악해지고, 화해에 무감할수록 정의는 더욱 필요해진다. 자연계에서 유일..
우리 선생님, 구미정 교수님 아니, 구미정 언니의 박사논문이다. 책으로 묶여서 나온 것을 샀다. 나는 이 선생님이 있는 줄도 모르고 (다른 선생님 때문에) 숭실대에 갔고, 생태여성주의와 여성신학이 만난 학문은 들어본적도 없는데 구미정 선생님께 그 학문을 배우며 그 안에서 길을 찾게 되었고, 소중한 스승과 학문을 통해 하나님과 사람과 세상을 보는 아름다운 눈을 얻게 되었다. 무엇보다 답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오랫동안 답을 찾고 있었음을 깨달았는데, 아시아에 사는 여성인 나에게 백인 남성 중심의 서구 신학은 맞지 않는 옷, 내 말을 할 수 없는 언어, 불편한 관점일 때가 많았음을 알았다. 여성신학, 민중신학, 탈식민주의, 한국의 신학 사상가들, 여성 사상가들, 아시아의 신학자들. 그들을 알게 되었고, 그들..
한나 아렌트가 '악'을 사유한 방식과 이유에 매료되어, 그를 본격적으로 읽기 위한 입문서로 도움을 받은 책. 어떤 사상가를 이해하기 위해 전후 맥락을, 그 사상 전반을 조망한다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작업인지. 아렌트 사상의 흐름을 보여주면서, 그 사상이 지닌 한계와 후대에 끼친 영향까지. 입문서로 손색이 없는 책이다. 인간이 생각하기를 포기하였을 때 악이 얼마나 평범한 곳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는지 이해하기 위해, 유대인 한나 아렌트는 가족과 같은 친구들을 잃는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그 이야기는, 작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에 잘 나온다. 마가레테 폰 트레타와 바바라 주코바 조합의 세 번째 여성 시리즈라고 해야 하나. 이 작품을 보고 난 후, 한나 아렌트를 더 입체적으로 보게 되었고..
히틀러와 스탈린이 쇤브룬 궁전 공원에서 우연히 마주칠 수도 있었고, 토마스 만과 프란츠 카프카가 같은 열차로 베를린으로 갔을지도 모를 일이며, 실제로 피카소와 마티스가 우정을 나누었던 1913년. 실제 20세기는 1913년에서야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보는 저자는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여 1913년을 재구성해낸다. 그것은 때로 한 여자 시인의 은밀한 내면 세계이기도 하고, 한 천재 화가의 미친 사랑이기도 하며,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불안과 우울로 가득한 모더니즘의 시대 풍경이기도 하다. 도대체, 이렇게 독창적이며 재미있는 영화 같은 시대 저술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자꾸 날개를 펼쳐보며 1971년생 플로리안 일리스의 얼굴을 쳐다보게 되었다. 초반의 신선한 자극이 뒤로 갈수록 약간의 뒷심 부족으로 지루..
나는 여기서 "자신의 문제를 풀어갈 언어를 가지지 못한 사회, 자신의 사회를 보는 이론을 자생적으로 만들어 가지 못하는 사회"를 '식민지적'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여기서 '식민지성'은 딱히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과 관련된 현상을 뜻하기보다는 지식과 삶이 겉도는 현상을 뜻한다._22쪽. 이십 년이 넘은 책을, 십 년 전에 구입해서 한 번 훑어보고 덮어두었다가, 무엇에 붙잡힌 듯 단숨에 읽어나갔다. 이런 것을 보면, 책은, 그것을 읽는 사람과의 인격적인 타이밍이 있는 것 같은 신비로움을 느낀다. 2주 전에 읽은 정희진의 글과 이번 주에 발제할 탈식민주의 이론가 가야트리 스피박-권정생 연결하기 작업에, 이 책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용기와 생명력 넘치는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십 여년 전에 이토록 앞서나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