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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수련. 본문

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글쓰기 수련.

paniyn 2014. 3. 14. 12:37

마크 롤랜즈는 위스키를 한 병 다 비우며 글을 쓰고, 셜록은 니코틴 패치라도 붙이며 생각을 해나가는데, 나는 꼴랑 커피 몇 잔에나 의지하여 생각을 감당하고 있으니 늘 허덕인다. 신앙적으로 표현하면, 성령이라도 충만해야 하는데, 이게 위스키에도 성령에도 취하지 못하고 있으니, 늘 미지근하다. 제정신으로는 이 긴장의 작업들을 감당하기 어렵고, 미지근한 정신으로는 미지근한 결과물만 나올 뿐이다.

한편, 내가 내 책상에 늘 놓아두는 책은 최종규의 <생각하는 글쓰기>다. 어떤 말을 쓰느냐에 따라, 우리의 생각이 달라진다는 것을 올곧게 밝히고 있는 글이다. 지식을 다루는 마음가짐, 지식을 북돋우는 슬기는 올바른 말로부터 나온다고 믿는 저자의 생각은 나의 지성을 맑게 정리해준다. 취하거나, 맑거나 무엇이든 하나는 되어야 할텐데 말이다.  

성찰지성. 그것은 삶의 균형과 영성과 더불어 피어오른다고 가르쳐 주시는 구교수님은 늘 나의 주변을 염려해주신다. 삶이 어지럽고, 일이 많아 균형이 깨지면 성찰지성이 발동하지 않는 법이라고. 나 역시 그것을 몸으로 잘 안다. 가령, 이전에 사역을 하면서 읽었던 책들이 내 안에 온전히 안착했을까, 의구심이 든다. 지금도 주변의 바쁜 사역자들을 보면, 과연 그들이 하나님과 사람과 시대를 제대로 사유하고 느끼며 '사역'이라는 것들을 하고 있는지 걱정이 된다. 그 당시의 나는 온전한 사유와 느낌을 가지기에는 너무 열악하고 빈약한 상황에 허우적댔었다. 나의 지난 시간을 돌아봤을 때, 그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렇게 거리를 두고 성찰의 공간을 두고나서 보니 보인다. 그때는 그저 앞으로만 바쁘게 걸어나가며 아무 것이나 마구 집어먹고 소화도 안 된 채, 정리도 하지 않은 채, 쌓아놓기에 급급했음을. 그리고 내가 그러고 있는 줄도 몰랐음을.

성찰과 사유가 없는 사역이라니, 끔찍하다. 그것은 폐허에 폐허를 더하는 일에 다름 아니다. 후원자에게 사역의 결과를 내보이기 위해, 활발한 SNS 활동을 독려하는 따위의 생각은 참으로 피상적이다. 혹은 소통이라는 미명 아래, 온라인에 과다하게 자기 노출을 하는 것. 사역자들에게 있어서는 한 번 심각하게 돌아봐야 할 일이다.

문득, 글쓰기는 수련이라는 생각을 한다. 몸과 마음과 영혼을 몰두 혹은 맑음에 내어맡기는 훈련. 하물며, 글쓰기도 이러한데 사람과 세상을 섬긴다고 하는 일에서야 두말할 필요가 있을까. 시편 120편으로 시작되는 순례의 시들을 하나하나 묵상중이다. 세상에 대한 거룩한 불만이 성전에 예배하러 올라가는 소중한 마음가짐의 발로라고 했던가. 그 마음의 불만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깨닫고 느끼려면, 수련자가 되어야 한다. 글쓰는 자나, 사역자나 모두.

논문이라는 것을 쓰면서, 종이를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나무를 아프게 하면서 나오는 결과물이 그저 남의 글이나 짜집기 한, 결과를 위한 결과가 아니기를 바란다. 짧고 어설프더라도, 독창적인 사유를 담은, 올곧은 우리 말로 쓴, 맑은 살림의 언어이기를 기도한다. 그래서, 최종규의 이 문장 하나가 나의 기도제목이 된다.

 

"말 한 마디를 쓰더라도 우리 넋과 마음과 삶을 일으키거나 사랑스레 보듬을 만한 말을 할 노릇입니다."

 

 

내가 남자로서 남자사랑을 하든, 남자로서 여자사랑을 하든, 남자로서 모둠사랑을 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어느 여자가 여자사랑을 하든, 남자사랑을 하든, 모둠사랑을 하든 다르지 않습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살아가는 그대로 아름답고 반갑고 좋습니다. 삶이란 다 다르기 마련이고, 이렇게 다 다른 삶을 나타내자면 말도 때와 곳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 자리에 알맞춤하도록 이러한 말을 빚고, 저 자리에 걸맞도록 저러한 말을 짓습니다. 이 물건에 들어맞는 이 이름을 붙이고, 저 물건에 알맞는 저 이름을 답니다. 붓으로 그려 붓그림이 되고 연필로 그려 연필그림이 되고 물감으로 그려 물감그림이 됩니다. 길게 써서 긴소설이 되고 짧게 써서 짧은소설이 딥니다. 손바닥만큼만 쓰면 손바닥소설이 될 테지요.

우리 깜냥껏 우리 터전을 북돋우는 우리 말을 빚어내기 정 어려울 때 비로소 바깥말을 들온말로 받아들입니다. 들온말로 받아들인 뒤 토박이말로 굳힐지 아니면 우리 깜냥껏 새로 토박이말을 빚어낼지는 오래도록 지켜보면서 살핍니다. 이러는 사이 들온말이 저절로 토박이말로 굳어지기도 하고, 먼 뒷날 우리 슬기를 빛내면서 새말을 빚어내기도 합니다.

 

말이란 그렇고 생각이란 그러하며 삶이란 그렇습니다. 처음부터 대놓고 이 말 저 말 가리지 않고 들여올 일이 아닙니다. 우리 몸에 알맞는지를 꼼꼼히 살피고 들여와야 합니다. 밥상에 차린다고 아무 먹을거리나 집어먹을 수 없습니다. 먹고살기 팍팍하다고 군인이 되어 싸움터에 나가 사람 죽이는 짓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없습니다. 또는 전쟁무기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거나 환경을 더럽히는 공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일할 수 없습니다. 밥 한 그릇을 먹어도 제대로 몸과 마음에 피와 살이 되는 밥을 먹을 노릇입니다. 돈 한 푼을 벌어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질 돈을 벌 노릇입니다. 말 한 마디를 쓰더라도 우리 넋과 마음과 삶을 일으키거나 사랑스레 보듬을 만한 말을 할 노릇입니다.

밥과 옷과 집이, 마음과 생각과 넋이, 삶과 일과 놀이가, 그리고 말과 글과 이야기가 따로따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모두 한동아리입니다. 한동아리 흐름이 어긋나게 하거나, 한동아리 흐름을 가꾸지 않고서야 우리 스스로 이 땅에서 서로서로 오붓하거나 즐겁게 살아가기는 어렵습니다. 말 한 마디 자그마한 구석을 알뜰히 가꾸는 동안 우리 삶 모두 알뜰히 가꾸게 되고, 말 한 마디 자그마한 대목이라고 업신여기며 내팽개치면 우리 삶 모두 대충대충이 되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업신여기는 셈입니다.

 

_최종규, '밝히기, 커밍아웃', <생각하는 글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