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파이 이야기 (31)
Timeful Friends
가령, 이런 부분. 아, 노예 이탈리아여, 고통의 여인숙이여, 거대한 폭풍우 속에 사공없는 배여, _연옥 제6곡 76-77행. 형제여, 세상은 장님인데 그대는 분명 거기서 왔군요. 살아 있는 그대들은 온갖 이유를 저 위 하늘로 돌리지요. 마치 거기에서 모든 것을 필연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말이오. 만약 그렇다면 그대들의 자유 의지가 소멸하고, 선에 대한 행복이나 악에 대한 형벌에 정의가 없어질 것이오. 하늘은 그대들을 움직이게 만들지만, 모든 사람이 아니고, 만약 그렇다 해도, 그대들에게 선과 악을 구별하는 등불과 자유 의지가 주어지니, 그것은 비록 하늘과의 첫 싸움에서 힘들더라도, 잘 길러 놓으면 결국 모든 것을 이깁니다. 그대들은 더 큰 힘과 더 나은 본성에 자유롭게 종속되고 그것이 그대들의 마음을 만..
0. 괴테가 '인간의 손으로 만든 최고의 것'이라 극찬하고, 보르헤스가 '모든 문학의 절정'이라고 추켜세웠으며, 영어판은 내가 존경하는 여성 사상가 도로시 세이어즈가 번역했다고 하며, 의 주인공이 손에 들고 다녔다는 바로 그 책.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엉뚱하게도 영드 의 셜록이 손에 들고 다니면 정말 어울리겠다는 상상을 해보았다. 지극히 현대적이며, 추론(reasoning) 외의 것을 믿지 않는 이 남자의 손에 이 들려 있다면 정말 포스트모던한 그림이 나올 것 같아서. 크크. 1. 단지, 단테가 지금 나와 같은 35살의 성 금요일에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은 것에서 시작한다는 이유로 지금 골라든 책. 무엇을 상상했든 그 이상. 어두운 숲에서 길을 잃은 단테는, 평소 정신적 스승으로 여겨오던 시인 베르길리..
올드보이를 보고나서 을 읽고 싶었다. 생각보다 짧은 작품이었지만 더 곰곰히 곱씹어야 할 것 같다.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오이디푸스 왕의 현대 한국 버전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디테일을 조금 비틀었으나, 그 비극적 운명은 다르지 않다. 지금 내게 왜 이런 일이 닥쳤는가를 알기 위해,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찾다가 맞닥뜨린 이 당황스러운 생의 진실이란.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를 묻는 작업은 무엇보다 위험한 일. 외에 같이 실린, , , 은 희랍의 고대 문학에 나오는 인물들이 비극적 각도에서 조명되어 나온다. 그들은 과장된 감정을 표출하고, 신을 믿으며, 가치를 숭상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딸인 안티고네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이들은 인간 종류의 각기 다른 원형들로서 풍성한 버전으로 재생될 수 있을 것 같다..
영화 을 보고나서, 더 공부해야겠다고 그리고 이런 작품 작업에 기꺼이 돈을 지불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구입한 책이다. 작가의 꼼꼼한 묘사를 통해, 복잡한 반도체 공정과 용어들, 작업 환경을 손에 잡힐듯 이해할 수 있었다. 삼성이라는 이름이 이 사회에서 끼치는 해악은 셀 수 없으나, 이 작은 만화를 통해 그 아주 작은 부분만을 봤을 뿐인데도 민망하고 또 민망하다. 경제를 조금만 공부해보아도, 재벌들이 나라 경제를 먹여살린다는 말이 얼마나 *뻥인지 누구나 알 수 있는 시대에도, "삼성이 설마 직원들에게 그랬겠어?"라는 질문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무엇보다 인간을 돈으로 매수하려는 태도, 그 매수의 태도조차 기만이었음이 드러나는 그들의 바닥은 탐욕의 절정을 보여준다. 이 책의 주인공인 정애정씨와 백혈병으로 돌아가신..
이 작품에 대해서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할지 모르겠다. 정의로운 세상이라는 이상을 품었던 한 소박한 남자의 내면과 패배에 관한 이야기. 아나키즘이라는 실패한 사상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스페인의 역사 속 민중들 이야기. 20세기 초, 전체주의의 물결 속에 스페인 안에서 있었던 투쟁들. 그 고난과 투쟁들 속에서 어떻게 이후의 스페인이 형성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인물들. 내가 사는 땅에서는 한 번도 꽃피워본 적 없는 사상이 스페인이라는 땅에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지를 알게되는 흥미로움. 물론 내가 다니는 역사연구소에는 근대-항일시대의 아나키스트와 아나키즘에 대한 책들이 다양하게 꽂혀있다.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 독립운동 속의 소수의 무리가 아나키스트였고, 그것을 기독교적으로 사상화한 김교신이나 함석헌도 있다. (비주..
리나,라는 텅 빈 기호 속에 무국적/다국적 자본이 새겨지는 과정을 무지막지한 스케일로 담아낸 이 '포스트모던 서사시'(소영현)는 한동안 나의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웠다. 탈북여성의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나? 이 책 어디에도 탈출한 집과 거하는 공간과 만나는 사람의 국적 따위는 설명되지 않는다. 자본과 남성으로 대변되는 어떤 권력으로 온통 유린당한 여자 리나, 이렇게 통통 튀는 생명력으로 삶을 한판 난장으로 만들어 버려도 되는거야? "나는 이쪽에도 저쪽에도 속하고 싶지 않았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일종의 중간자가 되고 싶었다"는 작가 강영숙의 무심한 듯한 저 말은 를 통해 통쾌하게(?!) 구현되는데, 리나가 마지막으로 오래 거주했던 공단지대에 탱크 폭발로 인해 후쿠시마 같은 사고가 났을 때의 한 장면을 관..
내가 사랑하는 것의 목록 수위에는 '김훈의 문장'이 있다. 아름답다고 여기는 것들중 하나를 꼽으라고 해도, 나는 '김훈의 문장'을 꼽을 것이다. 기자로서 글을 쓰던 그가 쓴 첫 소설이기도 한 은 이후 김훈이 보여주는 탐미적 허무주의, 역사를 이루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믿음이 투박하고 원색적으로 드러나 있다. 만약 이 책의 편집자가 편집자만큼 감각이 있었다면, 이 제목도 조금은 짧고 강렬해질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이 제목은 이 소설의 관념성을 그대로 투영한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다. ( 원래 제목이 였다는데. 문장은 수려한데, 제목짓는 감각은 투박 그 자체.) 를 패러디하자면, 이 책은 혹은 아니면 그냥 정도였어도 좋을 뻔했다. 추상과 추상과 추상이 빚어낸 어떤 구체적 인간의 이야기. 물론 가 이 ..
미학과 존재론의 상관성. "한 인간의 존재를 결정짓는 것은 그가 읽는 책, 그가 쓰는 글이라는 도스또예프스끼의 미학 공식은 이미 첫번째 소설에서부터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제부쉬낀과 바르바라는 이후 도스또예프스끼의 위대한 소설에 등장하게 될 무수한 작가들, 독서가들의 원형이라 할 수 있다."_227쪽, 석영중. 19세기 중반에 일어난 가난에 대한 러시아 버전의 고찰이 21세기 한국에서도 현실적으로 감각된다는 것은, 작가가 추출한 시선의 탁월한 보편성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19세기 사회보다 더 세련된 방식으로 가난의 상황이 포장되었을 뿐, 21세기의 빈곤이 그때보다 더 나아졌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마까르 알렉세예비치 제부쉬낀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성찰할 줄 아는 3차원적 인간에게 실..
2013, 올해의 마지막 책. 문학평론가 권희철은 이 소설을 두고 남성적 소설이라고 책 뒤에 덧붙였는데, 문장 하나하나가 머리와 가슴에 와박힌 나로서는 그러한 평가가 당혹스럽다. 자신의 마초됨을 거리낌없이 자백하는 김훈의 사유와 문장이 나에게 가장 친한 친구의 것으로 다가오는 것만큼. 아무래도, 그 짧고, 주저함이 없으며, 유쾌한 유머를 넘어 짖궂은 농담으로 점철된 그들의 문장들은 곧 내가 세상을 읽어나가는 나의 것이기도 하나보다. "문득, 졌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에 진 걸까. 그걸 모르겠다. 졌다는 느낌만 있다."(143) "무서운 거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145) 오늘도 이렇게, 무서운 시간에, 철저히 지며, 한 해를 보낸다. 살인자가 뒤죽박죽 체계가 무..
"엠마에게 그녀의 성(性)은 타인에게로 향하는 공적 자산이다. 사회적, 정치적 자산, 하지만 내게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사적인 것이다."_131쪽. "하지만 내 사랑, 넌 날 이미 살렸어. 넌 편견과 부조리한 윤리 위에 세워진 세상으로부터 날 살려내어 내 자신을 완전하게 이루도록 도왔어. 그 누구도 지금 내게 벌어진 일에 대해 잘못한 게 없어. 내가 가지고 가는 건 나의 가장 아름다웠던 추억들, 대부분 너와 함께 했던 추억들이야... 우리의 웃음, 우리의 사랑... 네 시선에 깃든 파란색, 온몸으로 부딪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그러면서도 널 사랑했던 청소년기, 그 시절 밤마다 내게 찾아들던 네 머리카락의 파란색. 나는 떠나고 너는 남는 지금, 제발, 부탁이야...넌 살아야 해. 네게 남은 그 소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