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파이 이야기 (31)
Timeful Friends
이 책에서 느낀 정서를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정요한과 김소희. 미카엘과 안젤로. 아니, 내가 생각한다기보다 자꾸 그들이 나에게 다가온다. 뜨거운 가슴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무엇보다 불의에 민감하고 날카로웠던 미카엘 수사, 하늘에서 방금 내려온 듯한 순결함으로 모든 생명을 있는 그대로 껴안은 안젤로 수사, 가장 인간적인 면모로 보통의 흔들리는 우리들 같은 요한 수사. 그 요한과 사랑한 소희. 그리고 소설 막바지에 이 모든 이야기의 반전을 이끌어내는 비밀을 간직한, 한국 전쟁 당시, 흥남 부두의 빅토리아메러디스호. 우리들은 흔들리지만, 역사는 흐르고, 그 역사를 이끌어가는 분은 견고하다. 미카엘이나 안젤로이고 싶었으나, 결국 나는 요한의 흔들림에 가장 공감할 수 밖에 없는 ..
오리지널리티의 힘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아름다운 여인으로 형상화된 북풍의 상징성은 풍부하다. 하지만 마지막 챕터에 가서야 비교적 뚜렷하게 그 의미의 장이 드러나는 북풍. 그저 바람으로만 읽다가 그 의미를 깨닫는순간, 반전의 묘미마저 느꼈다. C.S 루이스와 톨킨의 판타지의 뿌리는 조지 맥도널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들 스스로가 맥도널드를 그들의 스승으로 밝힌 바 있는데, 어떤 종류의 교훈이나 통찰을 판타지라는 장르를 통해 전달하는 면에서 이 작품은 단연 독창적이다. 북풍의 뒷편에 다녀온 다이아몬드가 어린아이답지 않은 지혜와 끈기 있는 삶의 태도로 현실의 삶을 일구어가는 면에서, 누군가는 기독교적인 무거운 교훈의 짐을 느낀다고 하였다. 하지만 그 태도가 무엇인지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추구하며 연습해 가는 ..
만약 실비아 플라스나 전혜린이, 에스더 그린우드처럼 피임 시술을 하고, 결혼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들 머리 위의 벨 자bell jar는 깨뜨려질 수 있었을까? 동시대에 너무나도 비슷한 삶의 행보를 걷고 선택한 그녀들을 다시 생각한다. 시몬 베유를 떠올리며, 문학과 철학/신학의 다른 결이 떠오르기도 하고. The Bell Jar 1963 by Estate of Sylvia Plath * 2013, 마음산책. (공경희 옮김)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I prefer not to)." 바틀비가 체제의 경계를 혼란시켰던 유행어다. 이에 그의 상사 변호사, 동료 필경사, 사환 아이 등, 체제에 길들여진 사람들도 그 말투를 따라하기에 이른다. 하지 않음,의 선택. 이에 대해, 들뢰즈는 바틀비를 미학적으로, 아감벤이나 지젝은 정치-신학적으로 격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허먼 멜빌의 상태를 이렇게 상상하여 묘사한 글을 통해 바틀비를 이해한다. 1863년 가을, 매사추세츠 농가의 작은 서재. 한 남자가 책상에 앉아 창밖을 내다본다. 소슬바람이 낙엽을 몰고 와 벌판에 홀로 선 농가의 유리창을 두드린다. 남자는 큰 체격은 아니지만 다부진 몸집에 얼굴이 불그스레하며 머리가 길고 수염이 덥수룩하다. 그는 소설가이다. 이 년 전, 심혈을..
폭우가 쏟아지는 속도로 아홉 편의 단편을 읽고 난 후, 저절로 나온 한 마디. "우와. 정말 재밌다..."ㅋ. 소위 '번역투' 문장이라는 이 새로운 형식의 문장과 내용의 구성은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비밀스러운 어떤 정경을 따라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경찰의 일상을 알지도 못하면서 주인공이 파출소장이라든가, 스물 세 살부터 부부관계 이야기를 그려냈다는, 이 '진정성 없는' 감정의 리얼리스트 손보미의 매력에 푹 빠졌다. 부르주아 남성의 자가당착과 맹목을 감싸안는 "여자들의 세상"을 이토록 교조적 느낌없이 우아하게 드러낸 린디합퍼, 손보미가 써내려갈 앞으로의 모든 글이 궁금할 예정. 2013, 문학동네.
신비의 여인, 에밀리 디킨슨. 20여년을 집에 은둔한 시인의 집에 초대받은 옆집 꼬마 여자아이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에밀리 디킨슨. "그게 시에요?" 내가 물었습니다. "아니, 시는 바로 너란다. 이건 시가 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일 뿐이야." 창턱 위에 놓아 둔 초롱꽃처럼 그분의 목소리는 가볍고도 예민했습니다. "아주머니께 봄을 좀 가져왔어요." 나는 호주머니에서 백합 알뿌리 두 개를 꺼내 그분의 무릎에 내려 놓았습니다. 내 책장에 앞표지가 보이게 새워놓은, 정말 아름다운 그림책. 문학적 감수성의 빛나는 폭발, 에밀리 디킨슨에 관한 동화같은 에피소드. EMILY written by Michal Bedard and illustrated by Barbara Cooney, 1992. * 1998, 비룡소 (김명..
윤태호는 국보급이다. 진지하고 성실하며 빛나는 문제의식을 지닌 일련의 작품들 속에서 '미생'은 단연 최고. 인간과 시대와 철학이 다 들어가 있다. 가장 흔하고 소시민적인 직장이라는 구체적 현실 안에서 그런 형이상학적인 가치를 끌어낸다는 것에서 진정한 작가란 생각이 든다. 어떠한 청년 담론보다도 적실하게, 엇나가지 않고, 과장하지 않으며, '88만원 세대'가 아닌, '미생' 세대를 창조해낸 것. 독자로서 큰 빚을 졌다. 내 것도 사고, 선물로도 손색없이 강력추천이며, 또한 그렇게 힘을 실어주고 싶다. (지금 연재중인 '인천상륙작전'도 치밀한 역사물이지만, 그 주제는 '인간'이라는 것. 결국.) 2013, 위즈덤하우스.
무겁고 과도하게 진지하며 어려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마스다 미리 시리즈를 한 권 집어든다. 역시나 가볍고 단순하나 결코 바람에 날릴 듯 가볍지 않고, 흑과 백처럼 단순하지 않은 쉼과 깨달음을 준다. 아무래도 싫은 사람. 어디에나 있다. '수짱의 결심'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번 스토리에서는 일터에서 사사건건 신경을 건드리는 '아무래도 싫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물론 읽으면서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고-.-; 어쩌면 이렇게, 집에 가면서 혹은 집에 와서 씻으면서 자려고 누워서 내가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세심하게 옮겨놓았을까 고마운 공감을 하며 수짱을 바라보았다. 수짱이 싫어하는 무카이 씨처럼 항상 남의 험담을 입에 달고 다니지는 않는지, 내 좁은 시야의 틀에서 다른 사람의 어떤 한 면만 보고 무심한 ..
필립 로스가 에서 했던 말. 노년은 대학살이다. 그 명언이 떠오른 것은, 정유정이 그려낸 화양의 재난 상황이 조용하고 평범해 보이는 우리의 일상을 극적으로 확대해 보였주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대학살이 어디 노년에서 뿐이겠는가. 지난 봄과 여름, 눈에 보이지 않는 재난 상황을 통과한 후여서인지, 숨가쁘게 달려가는 화양의 이야기는 고스란히 내 정신과 교감을 이루었다. 책 뒤에 붙은 작품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정여울이 '어떤 스캔들 속에서도, 어떤 정치적 외압 속에서도, 인간 개개인의 진실은 함부로 도륙당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썼는데, 나 또한 28일간 이 일을 겪은 다섯 주인공의 심정으로 그 깨달음을 가슴 깊숙한 곳에 남겨두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생명 그 자체에 대한 물음은 계속 화두로 남..
지난 번, 에서도 적었지만, '한국에는 왜 이런 언니가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그저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거창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에 뿌리박으면서도, 여성의 나이와 관련한 다양한 담론이 이야기화될 수 있는 그런 풍토. 한국판 제목은 한국식의 낚시법이 적용되었고, 내용은 제목이 풍기는 뉘앙스만큼 결혼의 여부에 관한 것은 전~혀 아니다. 다만 여느 미혼 여성 누구나 보편적으로 던지는 질문과 고민을 담담하게 그려냈을 뿐이다. 너무 사소하거나 너무 소수자의 것이기에 가려져 있었던 그런 질문과 고민들. 하지만 그 질문과 고민은 단순히 특정 성별과 나이에 갇힌 주제가 아니라, 결국 '삶은 무엇인가'로 까지 나아간다는 것이 훌륭한 것임! 이렇게 단순하고 짧은 만화로~ 2012, 이봄. (박정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