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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꽃 머리에 꽂고_문정희. 본문

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거대한 일상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_문정희.

paniyn 2013. 12. 25. 20:59

여성 연구자들의 포럼에서 어떤 연구자가 여성시를 소개할 때, 다시 만난 문정희.

<오빠>라는 통쾌한 시를 통해 이미 전부터 사모하던 문정희.

그녀의 시집을 읽었다.

전략을 얻는다.

가령, 이런 시 안에서.

 

 

물을 만드는 여자

 

딸아, 아무 데나 서서 오줌을 누지 마라

푸른 나무 아래 앉아서 가만가만 누어라

아름다운 네 몸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미는 소리에 귀 기울여 보아라

그 소리에 세상의 풀들이 무성히 자라고

네가 대지의 어머니가 되어가는 소리를

 

때때로 편견처럼 완강한 바위에다

오줌을 갈겨주고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때일수록

제의를 치르듯 조용히 치마를 걷어 올리고

보름달 탐스러운 네 하초를 대지에다 살짝 대어라

그러고는 쉬이쉬이 네 몸속의 강물이

따스한 리듬을 타고 흙 속에 스밀 때

비로소 너와 대지가 한 몸이 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푸른 생명들이 환호하는 소리를 들어보아라

내 귀한 여자야

 

 

그리고, 공감한다.

이런 시에.

 

 

찬밥

 

아픈 몸 일으켜 혼자 찬밥을 먹는다

찬밥 속에 서릿발이 목을 쑤신다

부엌에는 각종 전기 제품이 있어

일 분만 단추를 눌러도 따끈한 밥이 되는 세상

찬밥을 먹기도 쉽지 않지만

오늘 혼자 찬밥을 먹는다

가족에겐 따스한 밥 지어 먹이고

찬밥을 먹던 사람

이 빠진 그릇에 찬밥 훑어

누가 남긴 무 조각에 생선 가시를 핥고

몸에서는 제일 따스한 사랑을 뿜던 그녀

깊은 밤에도

혼자 달그락거리던 그 손이 그리워

나 오늘 아픈 몸 일으켜 찬밥을 먹는다

집집마다 신을 보낼 수 없어

신 대신 보냈다는 설도 있지만

홀로 먹는 찬밥 속에서 그녀를 만난다

나 오늘 세상의 찬밥이 되어

 

 

때로는 같은 물음을 던져보며.

 

 

파 뿌리

 

크고 뭉툭한 부엌칼로 파 뿌리를 잘라낸다

마지막까지 흙을 움켜쥐고 있는

파 뿌리를 잘라내며 속으로 소리 지른다

 

결혼은 왜 새를 닮으면 안 되는가

질기게 붙잡고 늘어져야 하는가

뿌리 없이 가볍게 날아다니는 깃털이란

그토록 두렵고 불안하기만 한 것인가

언제나 정주(定住)만을 예찬해야 하는가

가축처럼 번식과 무리를 필요로 하고

영원히 동반이어야 하는가

검은 머리는 언제 파뿌리가 되는가

 

나 오늘 파 뿌리를 잘라낸다

부엌칼 중 제일 크고 뭉툭한 칼로

남은 파를 숭숭 썰어

펄펄 끓는 찌개에 쓸어 넣는다

 

 

 2004, 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