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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과 을의 나라_강준만. 본문

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갑과 을의 나라

갑과 을의 나라_강준만.

paniyn 2013. 11. 6. 20:01

강준만은 오늘날에 유행어가 되어버린, '갑'과 '을'이라는 단어가 만들어내는 권력관계를 20세기 초의 한국 역사에서부터 그 근원을 따져본다. 1부 왜 한국인은 갑을관계에 중독됐나:갑을관계의 역사, 2부 갑을관계 문화가 낳은 사생아:브로커의 역사, 3부 선물은 '가면을 쓴 뇌물'인가:선물의 역사로 앞의 3부에서 먼저는 갑을 중심으로 형성된 권력관계의 긴 역사를 추적하고, 4부 권력자의 갑질에 시달려온 을의 반란:시위의 역사를 결론적으로 선보인 후, 을의 반란은 시대정신임을 강조하며 끝맺는다.

앞의 4부는 그의 본래 방식답게 충실하게 자료들을 섭렵하여 조직하고 해석해내며 논리를 이끌어간다. 그런 후에, 자신이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맺음말 부분에서 급격하게 토해내는 방식. 지루하다 싶을만큼 차근차근 그 논리를 따라가다가, 마지막에 설득당하면서, 머리가 시원해지는 기분이랄까.

 

 

갑을관계의 의제화는 일상의 수준으로 내려온 미시적 권력 관계로, 기존의 보수-진보 이분법의 효용이 다했음을 말해주는 징후인 셈이다._256.

 

"이제 문제는 미시 권력"이라는 문제의식의 변화는 때마침 만개한 인터넷 고발.비판 문화와 손을 잡는다. 인터넷 시대 이전이라면 이름 없는 을의 고발과 하소연에 누가 귀를 기울여주랴. 오직 인터넷만이 이름을 묻거나 따지지 않고, 고발과 하소연의 뉴스 가치에 주목해주는 포용력을 발휘한다.

이제 "을의 남편은 인터넷"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는 '빽' 없고 줄 없는, 보잘것없는 을들의 작은 반란에 만인이 주시하는 광장을 제공한 바, 그동안 밀실에서 한과 넋두리로만 존재하던 기막힌 사연들이 쏟아져 나오게 된 것이다._258-259.

 

정치가 유발한 염증과 혐오로 '권력'이란 단어를 입에 담는 것조차 역겹게 여기던 상황에서 정치적 이념과 당파성에서 자유로운 표현 방식으로 갑을관계가 차출됐다고 보면 안 되겠느냐는 것이다._259.

 

거대 담론으로서의 권력을 "거시 권력"으로 부르기로 하자. 거시 권력과 미시 권력의 차이는 매우 많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를 든다면 대중의 인식에서 후자는 이념과 당파성의 굴레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다. 당신이 "신자유주의 타도"와 "재벌 개혁"을 외쳐댄다면, 당신은 거시 권력을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도 진보파로 분류된다. 당연히 보수 언론으로부터는 외면받을 뿐만 아니라 비판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그러나 당신이 갑을관계의 횡포라는 미시 권력을 고발한다면, 당신은 피해자로서 진보와 보수를 막론한 전 사회 진영으로부터 지지받을 가능성이 높아진다._263.

 

왜 '시','실게요' 등이 전성시대를 누리고 있는 걸까? 갑을관계의 실행이 일상적 삶의 기본 문법이 됐기 때문이다. 언어 왜곡을 수반하는 이런 과잉서비스는 이미 조직 내에서 을인 노동자에게 고객을 대상으로 또 다른 을의 실천을 강요하는 것이지만, 그 이면엔 을의 신분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절대 대중에게 소비자일 때만큼은 갑의 지위를 누릴 수 있으니 소비함으로써 스트레스를 해소해보라는 마케팅 전략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세상살이가 어렵고 팍팍할수록 소비 서비스의 과공은 극단을 치닫는 기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_271. *김덕한, <'시'.'분' 전성시대'>, <<조선일보>> 2012년 6월 16일

 

평소 삶은 개인주의적으로 살되 사회적 문제의 해결은 집단주의적으로 하는 게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경우는 그게 뒤바뀐 감이 없지 않다. 삶은 집단주의적으로 살면서 사회적 문제의 해결은 개인주의적으로 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대학 입시 전쟁은 사회적 문제의 개인주의적 해결을 선호하는 한국인의 독특한 습속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증거일 것이다.

역설 같지만 갑을관계는 갑이 아니라 을에 의해 지속되는 체제다. 갑의 지위에 한 발짝이라도 더 접근하려는 을들의 투쟁이 갑을관계의 동력이자 보호막이다._276. *윤형중, <기자로서 부끄러운 얘기 하나 해도 될까요?>, <<한겨레>> 2013년 5월 11일 **마이클 프렐, <<언더도그마:강자가 말하는 '약자의 본심'>>

 

 

주옥같은 통찰들이다. 나 역시 일상 속에서 얼마나 깊이 갑을관계에 물든 구조에 적응하여 익숙하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있는지 모른다. 때로는, 학벌/지역이 만들어주는 갑의 자리에 있다가도 성별/자본/나이가 밀쳐내는 을의 자리로 가기도 하며, 정확히, "평소 삶은 집단주의적으로, 사회적 문제의 해결은 개인주의적으로"하며 살고 있다. 그러하기에 이렇게 시야가 탁 트이게 하는 통찰은 내가 처한 구체적 상황과 갈등을 밝히 볼 수 있게 하는 좋은 점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는 불편한 숙제를 안겨준다. 어떻게 밝은 시야로 정신차리고 살 수 있단 말인가? 이 숙제를 어떻게 풀 수 있단 말인가?

 

갑을관계라는 말은 공정보다 피부에 더욱 와 닿는 표현이며, 갑을관계라는 의제는 전형적인 '귀납적 개혁' 방식이다. 개혁의 대명제를 세우고 위에서 아래로 각 사안에 적용하는 방식이 '연역적 개혁'이라면, 대중의 삶의 현장에서 발생하는 개별 문제들을 해결해나가면서 아래에서 위로 개혁 명제를 세워나가는 방식을 '귀납적 개혁'이라 할 수 있다._263.

 

귀납적 접근. 흠. 결국 나는 강준만으로부터도 이러한 방향을 얻게 된다. 가장 일상의 자리에서, 구체성을 가진 단어에서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모든 길과 문제가 막연하고 저 멀리 있는 것만 같아서 일단 슬퍼지는 때에, 힘을 내고 정신차릴 수 있는 것은, 가장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누군가의 얼굴과 사건들 때문이다.

 

 

 2013, 인물과 사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