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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시간_박건웅. 본문

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갑과 을의 나라

짐승의 시간_박건웅.

paniyn 2014. 9. 3. 14:16

 

 

 

 

올해 부천만화대상을 수상한 박건웅 작가의 이 책은 1985년, 남영동의 김근태 이야기다. '짐승의 시간'이라는 계시록의 언어는, 실제 김근태가 자신이 당한 고문에 대해 붙인 이름이며, 나는 30년이 지난 지금 더욱 복잡하게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짐승화된 오늘을 마음에 품고, 엄연한 과거를 기록한 이 책을 읽어나갔다. 

어제 녹색당에서 문자가 왔다. 제2롯데월드 임시사용승인 규탄 기자회견에 참여를 독려하는 문자였다. 우리집 근처에 있는 그 제2롯데월드를 오고가는 길에 바라보며 나는 늘 중얼거린다. 괴물같아.

김근태의 시대에는, 독재자의 권력이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고 인간을 짐승으로 대했다면, 지금은 자본이라는, 마몬이라는 것이,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고 짐승으로 대한다. 제2롯데월드가 앗아간 생명만 해도 몇이며, 광화문에서, 밀양에서, 강정에서 위협받고 짓밟히는 생명들은 그 얼마나 넘쳐나는가. 그렇게 포악한 짐승의 횡포는 더욱 악랄한 수법으로 계속되고 있다.

나의, 우리의, 그리스도인의, 성경읽기가, 계시록 뿐만이 아닐지라도, 오늘날의 가장 병들고 부패한 지점의 폐부를 찌르는 읽기가 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라고 나는 또 생각한다. 성서신학적 비평에 몰두하다보니, 나의 결론은 언제나 이렇게 되네. ^^; 

 

'우리 모두가 김근태입니다'

 

가슴 아픈 계절입니다. 세월호 참사로 깊은 상처가 남았습니다.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기적을 기다렸습니다. 하루하루 분노했습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다시 기다립니다. 대한민국의 강한 변화를 기다립니다.

이 슬픈 계절에 남영동을 다시 만납니다. 두 해 전 '영화'로 만났던 남영동을 이번에는 '재판'과 '만화'로 다시 마주합니다. 남영동 고문사건 재판이 다시 열렸습니다. 결심 공판에서 김근태를 대신해 아내인 제가 최후 진술을 했습니다. 김근태의 무죄를 주장하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저 진실과 상식일 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28년 만에 무죄가 선고되었습니다. 대한민국 민주주의를 만든 우리 국민의 힘을 느꼈습니다. 김근태를 대신해 국민 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힘들었습니다. 물고문 장면에서 펑펑 울었습니다. 세월호에 갇힌 학생들이 떠올라 가슴이 찢어질듯 아리고 끝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책을 덮으며 생각했습니다. 몹시 불편한 진실일 텐데 왜 남영동을 그린 것일까.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인권이 자꾸만 후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문의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남을 절실함이 남영동의 김근태를 자꾸만 세상으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부조리한 세상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만든 세상입니다. 남영동과 세월호 사건은 우리가 만들어낸 괴물인 동시에 우리 자신의 모습입니다. 작품 속 화자인 이기영의 고백처럼 군사정권 시절 우리는 비겁한 변절자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위대한 현대사는 또 다른 유전자를 남겼습니다. 참혹한 역사를 희망의 역사로 만드는 유전자가 우리 사회에 흐르고 있습니다. 작품 속 이기영 작가가 남영동 건물에서 마주한 것은 고문과 조작의 흔적이 아닌 민주주의자 김근태였으며 주인공 자신이었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김근태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김근태의 길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작품 한 컷 한 컷 김근태가 있습니다. 김근태는 수도 없이 무너졌지만 늘 다시 일어섰습니다. 김근태는 따뜻했습니다. 진지한 눈빛으로 미소를 지었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우리를 위로했습니다. 김근태가 있어 행복했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또 다른 이름은 치유입니다. 너무나 아픈 요즘, 그만큼 위로와 희망이 간절한 지금, 우리 모두에게 김근태와 이 책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2014년 6월

인재근.

 

 

2014, 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