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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과 투신_윤경희. 본문

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연필로 고래잡는 글쓰기

유혹과 투신_윤경희.

paniyn 2015. 10. 8. 17:13

『낯선 시간 속으로』|이인성|1983|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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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은 시간의 조형물이다. 대담하게도 이렇게 정의하려면, 시간은 감각적 대상으로 점, 선, 면, 양감, 가소성 등을 지니며 일정한 공간을 점유한다고 전제해야 한다. 최소한 그렇게 상상해야 한다. 섬세한 철학 논증은 나중을 기약하며, 차라리 시간은 소설이라는 조형적 메타포를 통해, 필수 불가결한 허구 장치를 통해, 시·촉각적 구체성을 얻는다고 바꿔 말하자. 시간은 소설의 뼈대와 살을 투과하면서 인간의 감각에 영향을 행사하는 파상 에너지를 증폭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시간을 인식하고, 포합하고, 구부리고, 뭉치고, 절분하고, 배치하고, 놓아 보내며, 이 모든 과제의 완결을 미루며, 그것에 신체를 부여하는 기술이다. 시간의 운동성과 생성파괴력과 대결하며 마침내 그것과 닮으려는 정념의 기획이다.

  소설을 읽는 자는 그것과 거리를 둔 위치에서 언어 속 시간의 형상을 관조하는 데 자족해서는 안 된다. 감상은 조형과 마찬가지로 닮음의 충동에서 촉발되므로. 독자는 소설 속으로 투신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투신은 사랑의 행위이자 죽음을 불사하는 짓. 사랑과 죽음으로 시간은 다르게 감각된다.

 소설은 독자를 투신으로 유혹해야 한다. 이끌림과 빨려듦의 시공간을 조형해야 한다.

 

2

 이인성의 『낯선 시간 속으로』는 제목 그대로 시간을 투신 공간으로 조형하고, 목소리의 주인이 그 안으로 돌파해 들어갈 뿐만 아니라 독자도 그러하기를 기다린다. 소설은 곳곳에 "시간의 직선적인 흐름이 무너져 솟구치며 소용돌이치는" 점액질 허혈을 설치한다. 솔라리스 소설은 나선의 점막 조직이다.

 낯선 시간. 시간은 마치 타인의 얼굴인 양, 외지의 풍경인 양, 이방의 언어인 양, 소설적 인간은 그러므로 접촉, 충돌, 월경, 방랑의 용기가 필요하다.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에 나를 끊임없이 노출시키며, 그를 소유하기보다는 그에게 나를 위탁하며, 그의 힘이 내게 가하는 압인을 받아들이고, 그의 악력에 생겨나는 구멍, 굴곡, 윤곽으로 나를 조형하기. 『낯선 시간 속으로』 는 매순간 낯섦의 국면들을 겪어내며 그것의 상흔을 누적하는 게 생의 원리이자 소설의 미라 하는데, "상처를 통해, 마침내 우리는 다른 삶을 살기 시작할 것"이라고.

 

3

 사실의 시간과 허구의 시간을 겹쳐 연대기를 만들어보자. 작가 이인성은 1953년 겨울에 태어났고, 1983년 첫 소설집 『낯선 시간 속으로』를 펴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명시적으로는 1973년 겨울에서 1974년 겨울까지 일 년이다. 소설 속 청년은 만 스물넷이니 작가보다 세 살 많은 1950년생이라 추정할 수 있다. 마치 덧나기만 하는 실연의 상처처럼, 그는 현시점의 사건과 의식에 과거의 파편들을 끈질기게 틈입시키는데, 상처란 무엇보다 구멍이고, 구멍의 감각에서 낯선 무엇으로든 향하는 통로의 상상은 발생하니까, 가장 멀리서 불려온 기억은 네 살 무렵 "피난에서 돌아온 후 누상동 집에서 얼마간 나와 셋방살이를 했다는 동대문 밖 신설동 시절"이라 하니, 소설 속 시간은 엄밀히 따지면 1953년부터 1974년까지 이십여 년으로 확장된다. 작가가 실제 살아온 시간에 해당한다.

 독자인 나는 1973년 겨울 동대문 밖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낯선 시간 속으로』는 내가 태어난 시점에 시작해서 아마도 첫 단어를 말하고 첫 걸음마를 했을 돌 무렵에 끝난다. 나는 1993년 겨울 스무 살 언저리에 이 소설을 처음 읽었고, 이십여 년이 지난 지금 다시 읽었다.

 『낯선 시간 속으로』의 1973년 겨울에서 1974년 겨울까지는 물론 소설적 시간이다. 현실 세계의 역사와 일치하지 않고, 작가의 이력에 통합시킬 수 없으며, 독자의 생애와는 더군다나 무관한, 허구의 연혁이다. 문학과 현실은 서로에게 철저하게 낯선 것이어야 한다는 어떤 관념에 기계적으로 동의한다면 그렇다. 그러나 『낯선 시간 속으로』는 허구 곳곳에 생에 관한 사실의 파편들을 미끼처럼 흩뿌려놓음으로써, 상처의 연원에 사랑의 이끎이 실재했으리라, 사랑의 감각은 단지 결별과 망각으로 낯설게 된 것이리라, 유혹한다. 이 낯선 자의 소설은 마치 블랙박스처럼 내 생애의 첫 해를 나 대신 기억하고 기록한다. 소설 속 타인은 내가 기억하지 못해 낯설어진 시간을 나와 다르게 살아낸다. 나는 소설을 읽음으로써 허구적 타인의 생으로, 그의 시대 속으로, 낯선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삭제된 나의 발생과 생장을 타인이 조형해낸 섬세하고 풍요로운 허구를 통해 더 넓은 시간의 폭 위에서 가늠해본다. 낯선 시간 속에서 소설을 쓰는 자와 읽는 자는 동시대인이 된다. 동시대성이라는 낯섦을 사랑으로 감각한다.

 

4

 유혹과 투신은 운동이고, 모든 운동하는 신체는 궤적을 생성한다. 그렇다면 소설은 궤적의 조형물이라 덧붙여 말하자. 카프카의 굴, 보르헤스의 미로, 프루스트의 산책로, 소설은 실족을 유인한다. 잘못 들고 헛딛으며, 그러기를 바라며, 그러기를 그치지 않으며, 독특한 궤적의 시공간을 조형한다.

 『낯선 시간 속으로』는 70년대 서울이라는 특정한 시공간 답보의 궤적이기도 하다. 청년은 관광지 미구 여행 중 "미구의 여러 가지 모습에 대해서, 미구의 역사에 대해서, 군데군데 남아 있는 유적들에 대해 빼놓지 않고 이야기"해주는 남자를 상상하고, 베르길리우스에 이끌려 연옥을 유랑하는 단테처럼 그를 따라다니는데, 이 연극적 유혹자의 초상에는 택시를 타고 광화문, 서대문 로터리, 홍은동 네거리를 지나며 독립문과 세검정의 내력을 설명해주는 청년의 역사학자 아버지가 투영되어 있다. 미구의 사내는 청년 자신이기도 하다. 청년은 아버지에게 향토사학자적인 유전자를 물려받아서, 창경원, 대학로, 청계천, 피카디리 극장, 대학서점, 종묘 옆 여관 골목 등 출생 거주지 서울의 각종 지물 사이를 주파하고, "종로·신촌·제2한강교·화곡동·김포"행 대중교통의 경로를 정확히 전사하고, 술집, 다방, 호텔, 고우고우홀, 어물종합시장, 유원지 도깨비집 등에 출입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며, 눈으로는 유적지의 안내문과 극장 광고판을 일일이 녹취한다. 그는 이런 장소들에 투신하다. 학구적인 열정으로. 청년은 학림에서 만난 연인보다는 어쩌면 학림이라는 장소를, 하룻밤 쾌락의 기대보다는 고우고우홀의 장소성을, 음악 못지않게 음악다방을, 더 오래, 사랑하는 사람이다.

 청년의 향토사학자적 기질 덕분에 소설 속에는 뜻밖의 귀중한 증언이 남게 되었다. 인왕산 인근에 거주하는 그의 회상에 따르면, 동네 숲속에는 "구한말에 지어졌다는 고딕풍의 건물"이 있었고, "뾰죽당"이라 불리던 그것은 "육이오 이후에 국제연합의 무슨 기구"로 사용되었지만, 그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의 어느 날 불길에 휩싸였다. 그가 목격한 화재는 실제 역사적 사건이다. 뾰죽당은 1910년대 옥인동 47번지에 지어진 친일파 윤덕영 저택 벽수산장의 별칭으로, UNCURK 본부로 사용되다가 1966년 4월 5일 수리 공사 중 화재로 소실되었다. 현재는 붉은 벽돌 벽과 문기둥 일부가 남아 있다.

 소실. 소실의 시간성. 소실된 것들의 궤적. 1973~1974년 서울 지도에서 위치를 지목할 수 있었던 소설 속의 많은 실존 공간들은 2015년 현재 거의 사라졌다. 식민시대 유적 창경원은 동물원과 위락시절을 없애고 1986년 궁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했고, 개발독재시대의 고가도로와 유흥시설은 철거되거나 정비되었고, 국립대학교 문리대 캠퍼스는 1975년 혜화에서 관악으로 이전했고, 대학 소극장, 서점, 지하 술집, 음악다방 같은 청년 문화 공간들도 사라져 학림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낯선 시간 속으로』는 1973~1974년이라는 특정한 시간의 단층에 존재했던 한국 근대사의 다양한 헤테로토피아들을 기록한다. 도시 풍경화처럼. 특히 창경원에서의 궤적이란, 걸으며, 들어서며, 다가가며, 감아 돌며, 홍화문, 명정문, 명정전 등 현재 보존된 궁내 축조물의 명칭과 묘사에 더해, 열대관, 식물관, 사슴 우리까지, 새 우리 앞의 에뮤 식생 설명 표지판까지 치밀하게, 소설 속에 박물지가 잔존하다. 허구 속에 기록 장치가 작동한다. 잔재 청산, 개발, 재개발을 미명으로 하는 망각의 정치에 대항하여, 허구 속에 사실의 편린을 포용함으로써, 소설은 기억한다.

 

5

 그러나 풍경은 시간과 함께 운동하므로, 사라지는 장소들의 소설은 마침내 고지도 아카이브가 될 것이다. 그러나 오늘 이 허구를 읽는 자는 어쩔 수 없이 낯설어진 시간 속을 헤매며, 그것이야말로 소설의 유혹에 화답하는 일이니, 청년과 함께 "없음"과 "비어-있음"의 장소에 최선을 다해 헛딛는 수밖에. 노스탤지어를 실족의 향락으로 전환하며, 사라져 비어버릴 곳, 소설이 시간과 함께 마침내 이끌어갈 곳으로, 온 힘을 다해 투신하는 수밖에.

 

6

 두 군데를 더 말해야 한다. 무대와 무덤. 절대적으로 다르게 비어 있는, 절대적으로 낯선, 이 장소들의 언저리에, 소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