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meful Friends

방법서설_르네 데카르트. 본문

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공부하는 삶

방법서설_르네 데카르트.

paniyn 2014. 7. 10. 00:08

"양식(良識)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된 것이다. (Good sense is, of all things among men, the most equally distributed.)"

 

고전 그것도 철학서는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나에게 큰 흥미를 자극한 책. 일단 저 첫 문장을 읽고 바로 물음표를 붙였던 나는, <방법서설>의  첫 문장이 중세 스콜라 철학을 지나 인간의 주체성을 선언하는 중요성을 지닌 것과 별개로, 경험에 의해 저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역시나 난 근대인은 아닌가보다, 했는데, 그 다음에 줄줄이 써 있는 문장은 그런 내 생각을 예상했다는 듯이 전개되었다.

 

"왜냐하면 각자는 그 양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모든 다른 일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그들이 가지고 있는 양식보다 더 많이 원하리라고는 거의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 모든 사람은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옳게 판단하고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능력-그 능력을 사람들은 양식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이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은 자연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균등하게 배분되어 있다고 생각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가지는 의견의 엇갈림이 다양하게 많음은 우리가 우리의 사고(思考)를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인도하기 때문에 생기거나, 우리가 동일한 것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좋은 정신을 갖는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칙적인 것은 정신을 잘 응용하는 것이 긴요하기 때문이다. 가장 심오한 영혼은 가장 큰 덕도, 가장 큰 악도 범할 수 있다. 그런데 곧은 길만 따른다면 매우 천천히 걷는 사람들이라도, 빨리는 달리지만 곧은 길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들을 앞지를 수가 있다."

 

(번역이 매끄럽지는 않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기가 막힌 첫 문단이 아닌가. 양식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되었지만 그 정신을 제대로 응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누구나 지적 모험을 할 수 있는 텍스트를 이 책에서 제공한다. 당시의 학자연하는 사람들이 쓴 라틴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로, 그것도 자서전적 서사 방식으로. 이래서 근대 철학의 시작은 데카르트인가보다. 이전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지배 하의 스콜라 철학은 이미 정해진 답 안에서 '방법적 회의'없이 철학을 했다면 데카르트는 가장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 6부로 구성된 이 책의 6부에서 데카르트가 종교 재판 당하는 갈릴레이를 보고 이 논문을 책으로 내야하나 고민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어찌보면 소심해 보이는 고민까지 솔직하게 고백하는 이 책의 시작치고 첫 문단에서 담대하게 치고 나가는 그의 철학적 주장에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단숨까지는 아니지만, 그의 문체에 매료되어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었다. 한 호흡에 읽을 수 있고, 읽어야하는 책이었는데, 때로는 징징대는 것도 같고, 자기 잘났다고 깔때기를 대는 오만함도 보이는데 그 고백적 문체가 좀 재미있다.

그 유명한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엄청 유명한 말치고 4부 한 중간에 슬며시 고개를 들이밀고 있는데, 못 알아보고 지나쳤다가 책장을 다시 앞으로 넘겨 줄을 쳐야 했다.ㅋㅋ

자신의 감각과 상상력, 이전에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철저히 의심하고 진리를 탐구하는 데카르트는 신 존재 증명에서 심각한 허술함도 보이고; 그가 제시한 도덕 실천의 규범에서 순진한 보수성도 엿보이지만, 이것이 그의 첫 책이라는 점과 당대의 분위기에서 자신의 추론을 끝까지 밀어붙여 상승하고자 했다는 점은 지금 봐도 패기 넘친다.

무엇보다,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탐구하여 단단한 사고 위에 서고자 한 것, 그리고 그 내용을 속어인 프랑스어로 서술함으로 대중을 지적 탐구의 세계로 초대하고자 한 것,은 좋다. 무척.

스스로 사유하기보다 늘 남들에게 묻고, 의존하는 것으로는 결정적 삶의 행보를 걷기 어렵다. 멘탈갑의 원조인 데카르트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끝까지 가보려는 정신, 그것 같다. 물론 이 아저씨가 근대 분이시고, 포스트모던의 내가 보기에 어설프고 귀여운 논리도 많지만 시대의 한계를 고려해보면 참아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큰 한계는 지금 눈에서 볼 때 이성을 너무 신봉하고, 기계론적 사고에 깊이 매혹되었다는 점일텐데, 이제 와서 기술 문명이 넘치도록 발전하고 인간의 이성이고 뭐고 기술이 인간을 지배하는 지경까지 이른 사태를 보면 데카르트씨는 뭐라고 하실까. 약간의 반전은 철저한 이원론자였던 데카르트지만, 정신만을 강조하지 않고 연장으로서의 육체의 자리를 분명히 확보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요즘의 몸 철학에도 영향을 끼쳤다니, 이원론도 이원론 나름이다. 육체의 독립성을 인정했으니까 말이다.  

참, 덧붙이자면, 데카르트는 모든 동물을 정신이 없는 기계로 보았는데, 이것은 마치 17세기 어느 청교도의 책에서 본 성서 해석과 닮아있다.  아니, 그 청교도가 당대의 철학 아래 성서를 읽은 것이겠지. 동물에게는 영혼이 없고, 인간에게만 영혼이 있다는 기계론적 생각, 주지주의적 사상이 주류를 이루는 17세기 철학의 영향 아래 썼을 책을 21세기 교회에서 별 비판적 의식 없이 읽는다는 것도 놀랍거니와, 그 당시의 책만이 하나님의 영광에 둘러싸여 있고 현대의 책들은 쓰레기라고 말했던 한 청교도 목사의 말이 떠올라, 피식 씁쓸한 웃음을 지어본다. 

(올재 클래식스의 책은 출시될 때마다 무조건 구입! 책의 두께와 상관없이 고전을 널리 보급하는 의미에서 2,900원에 한정 판매한다. 성실하게 사두었더니, 보고 싶었던 고전을 바로 집어서 읽을 수 있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가만히 쳐다보다 두께에 밀려 일단은 조용히 내려놓았다.)

 

Discours de la méthode

by René Descartes

1637, 레이드.

*

2014, 올재 클래식스. (김형효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