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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슬립_레이먼드 챈들러. 본문

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파이 이야기

빅 슬립_레이먼드 챈들러.

paniyn 2014. 10. 11. 22:33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 작풍을 충실히 따를 정도로 좋아한다는 챈들러의 명성은 이미 김중혁이나 정유정 작가를 통해서도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챈들러의 무엇이 작가들로부터 무한 찬사를 받게 만드는 것인지 궁금했다. 설령 포크너라 할지라도 챈들러처럼 글을 쓸 수는 없다지.
그런데 내가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읽어서인지, 아직 한 권 밖에 안 읽어서인지 하드보일드의 맛을 제대로 느끼지는 못한 것 같다; 아니면 이미 그의 문체의 영향이나 '필립 말로'라는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의 전형이 이미 우리 시대에는 새로울 것이 없어져 그 오리지널리티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 수 있겠다.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묘사와 문체,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임무를 완수하는 말로의 쿨함은 어쩌면 우리 시대에서는 너무 흔해져 버렸으니;

깊은 잠,이라는 죽음의 직유는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그 주체가 밝혀지는데 누구나 깊은 잠에 이를 수밖에 없다는 보편적 실존 지점에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는 문학적 위상을 획득한다. 미국 LA 뒷골목의 고독한 수호천사랬나. 말로는 "하느님이 내게 주신 약간의 용기와 지성, 그리고 의뢰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기꺼이 괴로움을 감수하는 열성"으로 하루 이십오 달러의 일당을 받고 쿨하게 정의를 실현한다.ㅋ
필립 말로와 대등격인 셜록 홈즈가 주로 이성의 추론을 통해 사건을 풀어간다면, 말로는 발로 뛰는 편인데, 무엇보다 고독하고 수려한 외모 덕을 좀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그 쿨함 속에 내재된 인간에 대한 열정과 양심에 대한 신뢰 아닐까 싶다. 193-40년대 미국 자본주의 사회의 이면에 도사리는 괴물 같은 도시와 인간들의 냉혹한 세계를 정확히 알면서도 그 안에서 고독한 윤리적 실재로 존재하는 게 말로의 가장 큰 매력.
그래도 아직은 챈들러와 말로의 세계를 잘 모르겠으니, 다음 시리즈 또한 읽어봐야겠지?

The Big Sleep
1939 Raymond Chandler Limited, a Chorion Company
*
2004, 북하우스. (박현주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