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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영웅전설_박민규. 본문

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파이 이야기

지구영웅전설_박민규.

paniyn 2014. 5. 12. 11:27

내친김에 박민규의 첫 소설을 집었다. 원래는 <핑퐁>을 빌리러 갔었는데 그 자리에 떡하니 <지구영웅전설>이 있네? (하나도 아니고 두 번째 도서관에서도 <핑퐁>은 분명 '열람비치'였으나 제자리에 없었다! 무슨 일임. 아...정말 보고 싶다. <핑퐁>.) 삼미 바로 직전이자 박민규의 신인상 수상작이기도 한 <지구영웅전설>은 삼미와 그 문제의식을 같이 한다.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신랄한 풍자, 그것이다. 

"처음엔 강제가 아닌 줄 알았는데, 맙소사 황당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미국 현지에서 공부하고, 대학까지 나온 인재들도 요즘은 수두룩하다는 얘기다. 졸업장이니 뭐니 그런 것이 나의 약점이기도 하지만 이곳은 늘 그런 식이다. 말인즉슨, 싫으면 나가라는 얘기인 것이다. 그것이 한국의 시스템이다. 저질이다."(157쪽)

그것이 한국의 시스템이다. 저질이다. 이 두 문장에 살짝 소름이 돋았던 것은, 이이 십 년전 문장이라는 것다. 저 두 문장은 바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가?; 삼미에서 '삼미슈퍼스타즈'라는 전무후무한 실패의 야구단을 자본주의 반문화의 상징으로 내세웠다면, 이 책에서는 DC코믹스의 영웅들을 자본주의가 시대별로 세계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읽어낸다. 힘이 정의였던 시대의 슈퍼맨, 자본이 정의인 시대의 배트맨, 성을 대변하는 원더우먼. 무엇보다 재미있는 비유는, 자신의 스토리를 갖지 못하고 그들의 보조자로 머무는 바나나맨을 만들어내 한국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묻는 지점까지 가는 것이다.

만화같이 웃기면서도, 어떤 사회과학책보다 정치적 함의가 풍부하다. 이 글을 심사한 심사위원들은 그의 시각이 일반적인 수준이라고 평하였지만, 글쎄, 그건 식자들 세계의 이야기가 아닐까. 대중들에게까지 미국 패권주의가 일반적인 시각인지는 모르겠다. 특별히 정치사회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 굳이 할 필요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식의 상징 넘치는 이야기로 건네지는 정치사회 담론이 필요하지 않을까. 그래서 자본주의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우리의 친구들과 이 재기넘치는 문장을 나눠읽고 싶다. 

덧붙여,

책 뒤에 붙어있는 그의 인터뷰의 이런 구절, 정말 좋다.

"글쓰는 일은 격투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홍수환씨가 어느 경기의 해설에서 그런 말을 했어요. '예전의 복서들은 맨 먼저 파괴를 생각했다. 그런데 요즈음의 복서들은 승리만 생각한다.' 파이팅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지적인 거죠. 그래서 사람들은 점점 권투가 재미없어진다고 불평합니다. 제가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진 것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파이팅-격투가들의 대부분이 몸이 기형적으로 발달한 사람들이에요. 모든 근육이 골고루 발달하지 못했죠. 어떤 근육이 가볍지 않으면 다른 어떤 근육에 힘을 실을 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체형을 갖춘 작가란, 글쎄요. 전 파이팅이 아니라 헬스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런 몸을 가지고 실질적으로 데미지를 생각하는 분들은 없어요. 상대편을 꼼짝 못 하도록 끌어안고만 있으려 할 뿐이죠. 제가 하고 싶은 것은 파이팅이에요. 계속 쓸 생각입니다. 욕을 먹을 때도 있고 질 수도 있겠죠. 전 제가 잘 할 수 있는 것에 힘을 쓰고 몰두하려고 합니다."(179쪽)

 

2003,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