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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죄_이언 매큐언. 본문

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파이 이야기

속죄_이언 매큐언.

paniyn 2014. 5. 30. 00:28

역시 이동진의 빨책이 가진 위력이란. 요근래 <속죄>가 베스트셀러 목록에 보이는 것을 보면.ㅎㅎ 김중혁의 강력한 낚시에 기꺼이 낚여 이 두껍고 어려운 책을 문장 하나하나를 곱씹으며 읽었다. 지루하고 어렵고 불편한 긴장을 감내하며 읽어나가다 중간 이후 잠깐씩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던 이 이야기의 예기치 못한 방향, 도덕적으로 천진하며 자기가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착각한 열 세 살 브리오니로 비롯한 세실리아와 로비의 (...... 어떤 단어로 지칭하기 어렵다.) 불행, 아니,'사랑'. 그래, '사랑'. 이루지 못한, 순간의 관능과 애틋함, 그리움이 대부분이었을 사랑.

그 배경을 이루는 전쟁이라는 시대의 격랑은 이 소설의 장중함을 더하는데, 한 개인의 가장 사적인 영역인 듯한 사랑조차 그것이 얼마나 시대와 긴밀하게 연결될 수 밖에 없는가, 그런 외면하고픈 진실을 얼굴 앞에 갖다대는 듯하다. 그 진실이 무척 외롭고 쓸쓸하게 다가온다. 남녀의 사랑마저도 오롯이 둘만의 애정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요즘에, 기독교는 무엇보다도 '인간'에게 '인간'이 될 것을 말하고 보여주고 이끌어내는 것에 핵심이 있지 않을까,라는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낸다. 이미 주어진 제도 안에서 그것을 어떻게 굴릴까라는 고민 혹은 사람을 어떻게 특정 유형으로 만들어낼까, 어떤 옳음을 이루어낼까,라는 것에 골몰하기보다 인간, 역사, 실패, 사랑, 뭐 이런 것들에 구체성을 가진 깊이와 질문을 던지는 작업 같은 것. 그런 것을 해내는 설교, 사역, 성경 읽기, 교회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보는 것이다. 결국, 이언 매큐언 같은 작가가 이런 고전급의 문학을 통해 이루어내고 있는 세계가 기독교의 깊이었으면, 혹은 깊이여야 한다는 생각.

하지만, 우리의 기독교는 열 세 살 브리오니에 머물러있다. 자기합리화와 자아도취, 그러면서도 자신이 모든 상황을 이해한다는 착각 속에 사람과 사회에 행하는 윤리적 재단과 결단. 그리고 그런 미숙하고 천진난만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교회 문화와 사역 방식. 나는 그 안에서 브리오니가 될까 두렵다. 서로가 서로를 브리오니로 머물도록 방기하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상상력 풍부한 어린 소설가가 평생에 걸쳐 속죄할 수 밖에 없었던 도덕적 천진난만함이 한국의 기독교 문화와 보통의 기독교인들에게 오버랩되는 것은, 사회나 정치, 성과 문화를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좁아터진 수준의 사람들이 기독교 라는 제도권 안에 너무나 득실대기 때문인 것 같다. 브리오니라는 거울을 통해 기독교와 그 사람들이 비춰지는 것은, 내가 요새 만날 그 고민을 하고 있어서 그런가보다.

 

Atonement

by Ian McEwan,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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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문학동네. (한정아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