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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믿다_권여선. 본문

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명랑한 밤길

사랑을 믿다_권여선.

paniyn 2014. 2. 21. 21:19

온라인 헌책방에서 필요한 책을 구입할 때마다, 배송료를 덜어내고자 계획에 없는 책을 함께 고르곤 한다. 배송료에 지불할 돈을 책에 지불하겠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배송료 이상의 헌 책들을 모으는 이런 짓을 반복한다. 그래도 스스로 위로한다. 삶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처럼, 책을 구입할 때도, 나도 모르게 쌓인 어떤 직관에 따라 제목보고 고른 책이 길을 열어줄 때가 종종 있다고.

원래 무슨무슨 문학상 작품집을 잘 사지 않는데, 책들을 둘러보다가, 권여선이라는 작가와 '사랑을 믿다'라는 제목에 불이 환하게 켜졌다. 나는 무엇에 이끌린 듯, 확고한 신뢰로 화답하며 이 책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이전부터 권여선의 글을 읽어보고 싶었던 마음과 언제나 반쯤 회의적인 마음에 빠져 있는 내게 필요한 두 단어, 사랑과 믿음이 한꺼번에 들어있는 제목이 날 끌어당겼을 것이다. 또 다시 배송료 이상의 헌 책을 쓸어모으며.

오늘 취재를 오가던 길에 읽은 이 단편은, 신비주인자인 나를 더욱 확실한 신비주의자로 만들어 주었다. 불이 환하게 켜져서 구입했다 하더라도, 일단 구입한 책은 한 구석에 한참을 처박아 두는데, 이 책은 달랐다. 외출하려고 가방을 챙길 때, 어떤 책을 넣어갈까 고민하던 중, 여러 책 밑에 쌓여있던 이 녀석이 나를 불렀다. 그 음성에 응답하여, 여러 책을 들어내고 이 책을 굳이 힘들게 꺼내들어 얼른 지하철역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펼쳐본 책에서, 서른 다섯의 2월을 지나는 나와 같은, 서른 다섯의 2월에 홀로 단골 술집에 앉아 기억의 포즈를 취하는 주인공을 만났다. 이 책에 불이 켜졌을 뿐 아니라 오늘 나를 부른 이유가 있었어. 허허. 지금 만나야 할 책이었던 것이다.

내가 선호하는 아포리즘적 문체라든가, 통속적일 수 있는 '남녀간의 지나간 사랑'을 남자와 여자의 전혀 다른 깨달음의 타이밍으로 그려내는 어렵고 독특한 방식이라든가, 우연히 마주친 다양한 세대의 세 여성들의 모습으로 지금 자신의 고통을 정리할 수 있었던 스물아홉 여자의 처연함, 나이와 사랑에 관한 주옥같은 통찰까지.

어느 것 하나 내 마음에 쏙 들지 않은 것이 없다. 든든한 친구를 얻었다.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긴다는 건 일상생활에는 재앙일지 몰라도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다."_11쪽.

 

"사랑과 믿음, 상당히 어려운 조합이다. 그나마 소망은 뺀다 쳐도, 사랑과 믿음 중 하나만도 제대로 감당하기 힘든 터에 감히 둘을 술목 관계로 엮어 사랑을 믿은 적이 있다니. 믿음을 사랑한 적이 있다는 말만큼이나 뭐가 뭔지 모르게 모호하고 추상적이다."_12쪽.

 

"동네에 단골 술집이 생겼다는 건 기억에 대해서는 한없는 축복이지만 청춘에 대해서는 만종과 같다. 사랑을 믿던 한 시기가 끝났으며, 뒤를 돌아보아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지금 서른 다섯이라는 인생의 한낮을 지나고 있다. 태양은 머리 꼭대기에서 이글거리지만 이미 저묾과 어둠을 예배하고 있다. 내 생애의 조도는 여기가 최대치다. 이보다 더 밝은 날은 내게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내 인생이 연령의 절반을 꼭짓점으로 하여 직각으로 꺾이는 형태라면, 그녀의 인생은 앞쪽이 다소 높은 산의 능선처럼 삼분의 일 지점에서 봉우리를 이룬 후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형태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개인적인 멜로디가 있다. 이십대 후반 무렵 나만큼이나 겁이 많고 감정에 인색했던 그녀가 내게 보내온 노래는 매우 낮은 음역의, 들릴 듯 말 듯한 작고 희미한 멜로디였으리라. 나는 그것을 나와 무관한, 그녀의 희한한 개성으로 간주했다. 스물아홉의 봉우리에서 그녀는 너무 일찍 철들었고 다가올 어둠에 너무 일찍 눈이 익어버렸다. 낡은 삼층 건물의 어둑한 실내에서 그녀가 낯선 여인들을 통해 본 것은 그녀의 미래가 그리는 능선이었을까. 삼 년 전 그녀는 이미 오후를 사는 사람의 나른한 눈빛을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지금의 내 대낮같은 기다림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은 전적으로 그녀의 작은 노랫소리를 알아듣지 못하고 다른 여자의 새된 노래에 혹한 내 귀의 어두움에서 비롯된 일이다."_40쪽.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_41쪽.

 

 

이 책의 전 주인이 쳐놓은 단 하나의 밑줄은, 이 소설의 숨은 주제.

 

"사는 데 애착이 있는 한 희망은 있는 거잖아."_20쪽.  

 

2008, 문학사상사. <2008 제32회 이상문학상 작품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