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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한나 아렌트_사이먼 스위프트. 본문

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공부하는 삶

스토리텔링 한나 아렌트_사이먼 스위프트.

paniyn 2014. 1. 26. 21:34

 

 

한나 아렌트가 '악'을 사유한 방식과 이유에 매료되어, 그를 본격적으로 읽기 위한 입문서로 도움을 받은 책. 어떤 사상가를 이해하기 위해 전후 맥락을, 그 사상 전반을 조망한다는 것이 얼마나 흥미로우면서도 중요한 작업인지.

아렌트 사상의 흐름을 보여주면서, 그 사상이 지닌 한계와 후대에 끼친 영향까지. 입문서로 손색이 없는 책이다.

인간이 생각하기를 포기하였을 때 악이 얼마나 평범한 곳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는지 이해하기 위해, 유대인 한나 아렌트는 가족과 같은 친구들을 잃는 고통을 겪기도 하였다. 그 이야기는, 작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된 <한나 아렌트>에 잘 나온다. 마가레테 폰 트레타와 바바라 주코바 조합의 세 번째 여성 시리즈라고 해야 하나. 이 작품을 보고 난 후, 한나 아렌트를 더 입체적으로 보게 되었고, 더불어 그 조합이 힐데가르트 폰 빙엔과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룬 다른 두 영화도 보고 싶다는 갈망이 생김.

 

 

 

하이데거를 생각중인 아렌트. 결국 어떤 면에서 그녀에게 최고의 연인 아니 인간은 하이데거였을지도. 

 

 

예리하게, 아이히만 재판을 지켜보는 중. 아이히만 같이 평범한 인간이 그렇게 큰 악을 저지른 것은, 전혀 새로운 관점에서 인간을 보아야 하는 것이었다.

 

 

영화에서 표현된 메리 맥카시와의 우정은 무척 부러웠던 부분. 아, 그리고 무엇보다 아렌트가 남자들과 이성으로서나 우정으로서나 잘 지내면서도, 질척이지 않은 부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마지막으로 심보선의 시 하나.

시의 두 번째 문장에서 나는 바로 이 H.A.를 떠올렸는데.

 

 

H.A.에게 보내는 편지

 

당신이 쓴 글을 우연히 보았습니다. 나로 하여금 단번에 당신을 사랑하게 만든 그 매혹적인 글을. 영혼에 관한 글이었던가요? 세상의 모든 글은 영혼에 관한 글이라고 믿습니다. 당신과 나는 도서관이나 서점에서 우연히 마주친 적이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 둘이 가장 가까웠을 때도 우리의 그림자는 겹쳐본 적이 없었지요. 지금 우리 사이의 거리는 지금까지 우리 사이에 놓였던 거리 중에 가장 멉니다. 이곳은 하늘의 별빛이 사람의 눈빛을 닭 모이처럼 쿡쿡 쪼아 먹는 땅이라는 기이한 이름을 가진 이국의 도시입니다. 이 가난한 나라의 아침도 여느 곳과 다름없이 하나의 위대함을 이룩한답니다. 정오까지 태양을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올려놓기. 당신 영혼의 아침은 가장 높은 곳에 무엇을 올려놓으셨나요? 오늘은 새벽부터 비가 내립니다. 때때로 비는 성부 성자 성신의 이름으로 내린다고 믿습니다. 잎사귀들은 믿음이 약한 순서대로 떨어지지요. 그러나 믿는 자에게도 파국은 온다는 것, 그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당신에게도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저 역시 당신처럼 신을 믿습니다. 불가능한 일에 대해 묵상하는 것이 저의 취미랍니다. 이제 제가 왜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는지 아시겠습니까? 당신은 오래전에 죽었으니까요. 당신의 육신은 흔적 없이 사라져 우리 사이에는 혼혈아도 고양이도 베고니아도 태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입을 맞출 수 없다는 사실을 축복이라 믿어야 하나요? 지금 나는 당신이 담배를 물고 있는 흑백사진 한 장을 바라보며 담배 한 대를 물어봅니다. 탁자 위로 낯선 향유 냄새를 끝없이 피워 올리는 촛불로 담뱃불을 붙이고 나면 나는 그 불로 마지막 문장 하나를 남긴 이 편지도 태울 것입니다. 그것이 이 편지가 그대에게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으니까요.

 

 

Hannah Arendt by Simon Swift

Routledge Critical Thinkers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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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앨피. (이부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