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천 개의 공간에서 놀기 (111)
Timeful Friends
"양식(良識)은 세상에서 가장 공평하게 분배된 것이다. (Good sense is, of all things among men, the most equally distributed.)" 고전 그것도 철학서는 어려울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 나에게 큰 흥미를 자극한 책. 일단 저 첫 문장을 읽고 바로 물음표를 붙였던 나는, 의 첫 문장이 중세 스콜라 철학을 지나 인간의 주체성을 선언하는 중요성을 지닌 것과 별개로, 경험에 의해 저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역시나 난 근대인은 아닌가보다, 했는데, 그 다음에 줄줄이 써 있는 문장은 그런 내 생각을 예상했다는 듯이 전개되었다. "왜냐하면 각자는 그 양식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모든 다른 일에 대하여 완전히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들도 그들이 가지..
"이사야에게 말이란, 참된 것과 아름다운 것과 선한 것을 만들어 내는 물감이요 멜로디요 조각칼이라 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죄와 악과 반역을 부서뜨리는 망치요 창이요 메스가 되기도 한다. 이사야는 그저 정보만을 전달한 예언자가 아니다. 그는 비전을 창조하고 계시를 전하고 믿음을 세워 준 사람이다. 그는 실로 근본적 의미에서의 시인, 곧 장인이다. 하나님의 현존을 우리 피부에 와 닿게 하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히브리 민족이 낳은 최고의 예언자요 시인이다." _유진 피터슨, , 이사야 머리말. 응. 메시지로 이사야를 한 호흡에 읽으며 내가 느낀 것이 바로 이와 같다. 물기 어린 시어에 담긴 현실 너머의 환상. 하지만 그 환상의 시어는 이사야 전반부에 드러난 현실의 처절한 언어를 기반으로 했기에 더욱 ..
강정 평화의 집짓기를 지지하고, 후원한다. 제주도가 고향인, 대학원 후배와 함께, 6호선 증산역에 내렸더니, 이렇게도 세심하게 바닥 안내판을 붙여놓았다. 제주 평화순례단,의 꼼꼼한 공연 준비는 여기서부터.^^ 홍순관과 함께 하는,이 붙어 있었던 평화 콘서트. 매끄럽고 위트 넘치는 진행. 길 위의 예배자. 노래가 참 좋다. 쌀의 노래 : 평화는 모든 사람의 입에 곡식을 공평하게 넣어 주는 것이다. 심봉사 젖동냥, 스마트 폭탄가에서 빵 터짐. 평화는, 젖동냥이다! 함께 키우는 것이니까. "평화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평화가 길입니다." 이지상의 사실, 노래 손님 중간 중간의 강정 투쟁 기록 영상을 보면서 마음이 짠해서 울컥울컥 했는데, 이 노래 앞에서도.ㅠㅠ 콘서트의 중심, 송강호 박사님과 김선우 시인의 강..
감각적인 제목이 주었던 기대만큼 재미있게 읽지는 못했지만,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고난 듯한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뭔가 영화화하기에 좋은 밑밥들이 깔려있는 소설같다. 난 구동치 역할에 하정우를 떠올렸고.ㅋ) 딜리터, 역할을 하는 탐정 이야기인데 그 소재의 참신성과 제목만큼 감각적인 주인공 이름 구동치, 뭐, 이 정도까지의 설렘 이상의 것을 얻지는 못한 것 같다. 그래도 인간 실체를 관념적 서술이나 내면 천착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원동력인 돈-거대 기업의, 성-포르노 사업을 매개로 건드려보려고 한 것, 인간이 기억을 소유하려고 하는 욕망이 어쩌면 자신의 흔적을 남김없이 지워버리고자 하는 욕심과 한통속은 아닐까,라는 질문을 생각했고 내 삶을 좀 돌아보게는 되었다. 만약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이 세상..
지금이라고 말해줄게, 강물이 흐르고 있다고, 깊지는 않다고, 작은 배에 작은 노가 있다고, 강을 건널 준비가 다 됐다고 말해줄게, 등을 구부려 머리를 감고, 등을 세우고 머리를 빗고, 햇볕에 물기를 말리며 바위에 앉아 있다고 말해줄게, 오리온 자리가 머리 위에 빛나던 밤과 소박한 구름이 해를 가리던 낮에, 지구 건너편 어떤 나라에서 네가 존경하던 큰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나도 들었다고 말해줄게, 돌멩이는 동그랗고 풀들은 얌전하다고 말해줄게, 나는 밥을 끊고 담배를 끊고 시간을 끊어버렸다고 말해줄게, 일몰이 몰려오고, 알 수 없는 옛날 노래가 흘러오고, 발가벗은 아이들이 발가벗고, 헤엄치는 물고기가 헤엄치는 강가, 뿌리를 강물에 담근 교살무화과나무가 뿌리를 강물에 담그고, 퍼덕이는 커다란 물고기가 할아버..
버스에 가장 오래 앉은 사람은 가장 바깥에 산다 그곳은 춥다 버스에 외투를 벗어두고 종점에서 내린 적이 있다 다른 나라 더운 도시의 공항이었다 맨발로 비행기에 올라 더 멀리 나는 갔었다 옆자리에는 같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의 이어폰에 찌걱찌걱 노래가 흘러나왔을 때 같은 이별을 경험한 사람임을 알았다 그때 그 버스에 가장 오래 앉은 한 사람은 내가 벗어둔 외투를 챙겨 입고 혹독한 겨울로 무사히 들어갔을까 버스 종점에서만큼은 커피 자판기가 달빛보다 더 환하면 좋겠다 동전을 넣고 손을 넣었을 때 산 짐승의 배 속에서 꺼낸 심장처럼 뜨끈한 것이 손에 잡히면 좋겠다 어떤 나라에서는 발이 시리지 않다 어떤 나라에서는 목적 없이 버스를 탄다 그러나 어떤 나라에서는 한없이 걸어야 한다 피로는 크나큰 ..
장미꽃이 투신했습니다 담벼락 아래 쪼그려 앉아 유리처럼 깨진 꽃잎 조각을 줍습니다 모든 피부에는 무늬처럼 유서가 씌어 있다던 태어나면서부터 그렇다던 어느 농부의 말을 떠올립니다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을 경멸합니다 나는 장미의 편입니다 장마전선 반대를 외치던 빗방울의 이중국적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이 모두 다 아는 일이 될 때까지 빗방울은 줄기차게 창문을 두드릴 뿐입니다 창문의 바깥쪽이 그들의 처지였음을 누가 모를 수 있습니까 빗방울의 절규를 밤새 듣고서 가시만 남아버린 장미나무 빗방울의 인해전술을 지지한 흔적입니다 나는 절규의 편입니다 유서 없는 피부를 경멸합니다 쪼그려 앉아 죽어가는 피부를 만집니다 손톱 밑에 가시처럼 박히는 이 통증을 선물로 알고 가져갑니다 선물이 배후입니다
유머, 놀이, 풍자, 농담, 웃음....의 언어 그리고 신학. 지금 나의 가장 큰 화두다. 권정생의 를 신학화하는 작업은 곧 하나님의 유머를 닮은 인간의 언어를 들여다보는 일이 될 것이다. 그 작업 가운데 이 책에서 콘라드 하이어스의 비극과 희극 연구는 여러 가지 통찰과 격려를 주었다. 성경을 비장하게, 교리적으로 보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농담으로 꿰뚫은 관점은 ('긍정의 힘'이 아니라) 삶의 긍정성, 놀이로서의 삶, 해방과 경축을 조명한다. 하나님 나라는 모든 것이 뒤집어지는 희극의 결말과 같은 것. 어린아이가 높은 자가 되고, 거지가 천국에 가며, 초대받지 못한 자가 잔치의 주인공이 되고, 바보가 곧 하나님의 지혜의 담지자가 된다.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서 사역을 시작하고, 계시록의 결말 역시 잔치로 ..
지난 봄 내내, 머리맡에 두고 사랑하였던 시집. 단어 하나, 문장 하나, 그냥 넘어갈 수 없었던 깊음과 슬픔이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 용산이라고, 강정이라고, 그런 단어 하나 쓰지 않았지만, '장미꽃의 투신'이라거나, '유서 없는 피부를 경멸'하던 시인의 마음은 내게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내가 수학자의 고뇌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수학자의 마음, 그리고 깊은 아침,은 꼭 기억하려고. 2013, 문학과 지성사.
잡지를 만든다고 모이는 모임의 책임자가 시시각각 보내오는 참여독려문자를 불편한 심정으로 마음 한 켠에 개켜두었는데, 오늘 막상 직접 그 책임자의 책임자와 통화를 하고나니 마음이 한결 더 불편해졌다. 오랜기간 여러 잡지를 정기구독하고, 잡지를 좋아하고, 그 형식의 잡스러움을 사랑하는 바이지만, 잡지를 만드는 일에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웃기는 일이다. 열혈독자지만, 내가 잡지를 만들 마음은 없다는 것. 부질없이 실패할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가? 아니, 이미 구술문화가 다시 도래한 듯한 이 세대에, 이미지 인문학을 말하는 시대에, 텍스트 중심이 될 것이 뻔할, 그리고 딱히 고퀄이거나 대중의 관심을 끌지도 못할 주제일 것이 예상되는, 무엇보다 매체 환경에 그다지 감각적이지 못한 누군가들이 이 일을 한다는 것이..